■6·25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중인 정치범 1,800명을 포함, 재소자 수천명을 한국 군경이 집단 처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미국이 공개한 문서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북한 인민군의 남하작전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 공산주의에 협력한 혐의로 복역중인 이들이 석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처형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해서 대전형무소에서 처형이 이뤄졌다는 50년 7월 첫째주 전후를 둘러싼 전쟁 상황을 되돌아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50년 6월25일 오전 4시 북한 인민군의 기습공격에 우리 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전선이 차례로 무너진다. 인민군은 남하작전을 계속해오면서 3일만인 6월28일 수도 서울을 점령한 뒤 서울지역 형무소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만다. 그러나 식량 무기 장비 등 보급물자가 완전 바닥 나고 극도로 피곤해 지친 인민군은 북한으로부터 추가보급을 받고 남한에 있는 남로당이 봉기하기를 기다리면서 일단 서울에 머문다.
7월4일 추가보급을 받은 북괴군은 이날 오전 6시부터 한강도하작전에 나서 밤까지 도하를 마치고 수원을 함락하는 등 한강이남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인민군의 남하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이날 일본에서 급파된 미24사단 예하 스미스대대가 평택에 도착, 진지를 구축한다. 다음날인 7월5일 오산에서 인민군과 스미스부대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스미스부대는 패배했다. 이어 7월8일 천안, 9일 대전 바로 위쪽인 전의지역이 함락되고 우리의 방어선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같은 전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군경이 대전에서 정치범들을 집단처형한 시기는 7월2일부터 8일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한국전쟁에 정통한 국방부 한 관계자는 『당시 형무소에 수감중인 정치범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우리측은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할 경우 서울에서 그랬듯이 이들을 모두 석방할 것으로 염려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때문에 대전 함락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석방될 경우 인민군에 동조할게 뻔한 1,800명의 재소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게 되자 집단 처형한 게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정치범 집단처형] "참관단에 美장교 포함 미국에도 책임"
미국 최고의 한국전쟁 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시카고대)는 6일 대전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 사건과 관련, 『이 사건은 노근리 사태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며 『미군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군과 한국군은 똑같이 유엔군의 일원이었고, 미군 고급장교가 포함된 참관단이 현장에 있었으며, 한국군의 처형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군경의 대전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은 50년 7월 4-6일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커밍스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프린스턴대학 출판부, 1990년) 제2권 699쪽에 인용된 1950년 8월9일자 「런던 데일리 워커」지 기사에 따르면 학살은 7월 2-6일 있었으며 첫 이틀간은 처형장소를 준비하고 처형은 사흘째 시작돼 3일간 계속됐다고 보도했다.
런던 데일리 워커지는 당시 영국에서 발행된 공산주의 계열 신문. 이 신문의 한국전쟁 종군기자인 앨런 월밍턴 기자는 북한군을 따라 전선을 다니며 취재를 했으며 대전형무소 재소자 처형현장도 방문했다. 월밍턴 기자는 목격자 20명을 인용, 『2일 한국 경찰이 트럭 여러 대를 타고 나타나 현지 주민들에게 각각 200야드 깊이의 구덩이 6개를 파도록 했다. 재소자들은 총살되거나 칼로 머리가 잘려 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미군 장교들이 짚차 두대에 나눠 타고 현장에 나타나 처형장면을 참관했다』고 보도했다.
처형장소는 월밍턴 기자는 대전 인근 양월(Yangwull)이라고 보도했으나, 커밍스 교수는 이 지점이 미육군 군사지도에는 낭월(Nangwull)로 쓰여 있다고 밝혔다.(현지 확인결과 낭월로 확인됨)
커밍스 교수는 『선교사 J. 언더우드가 당시 대전교도소 재소자가 약 2,000명 수준이라고 말했는데 재소자 전원이 처형됐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LA미주본사=한우성기자
■[정치범 집단처형] "야사에 묻힌 만행밝힐 귀중한 자료"
-야사에 묻힌 만행을 밝힌 역사적 증거
-당시 학살의 주역과 미국의 방조여부도 밝혀야
-「정치범들이 처형된 계곡에는 핏물이 넘쳤다」 「인민군도 우익인사 학살했다」 등 유족및 생존자 증언도 이어져
정치범 집단학살에 대한 본보의 특종 보도(6일자 1·3·30면)와 관련, 6일 본보 편집국에는 문서 사본을 요청하는 학계 관계자들의 문의와 생존자 및 유족의 증언이 잇따르는 등 사회 각계의 비상한 관심이 이어졌다.
성균관대 서중석(徐仲錫·사학) 교수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과는 달리 정치범 학살의 경우 수감자 대부분이 타지역 출신이라 주민증언을 참고하더라도 신원 및 학살규모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며 『이번 문서는 그간 야사(野史)에 묻혀있던 정부차원의 조직적인 정치범 학살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서 귀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서교수는 또 『더욱이 「명령은 최상층부에서 내려졌다」고 적시한 점에서 학살의 주역이 누구인지 밝혀야 할 것이며 미국 정부가 학살을 방조했는지에 대해서도 규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동국대 강정구(姜禎求·사회학) 교수도 『개전 초기 보도연맹을 비롯, 30만명 가량의 정치범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중 상당수가 무고한 양민이었던 만큼 이번 계기를 통해 정확한 역사적 진실이 가려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대전에 거주했던 박주양(朴珠陽·66)씨는 『넷째 형은 단지 사회주의 서적을 한번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됐고 전쟁발발 후 곧바로 형무소로 끌려가 처형됐다』며 『형이 처형된 대전 산내면 낭월리 계곡에는 며칠동안 핏물이 흘렀다』고 당시의 참상을 알려오기도 했다. 그는 또 『한국 군경에 의한 정치범 학살외에도 북한 인민군 역시 400여명의 우익인사들을 대전형무소에서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이주훈기자
ju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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