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의 첫 며칠이 지나가고 있다. 새 천년이다, 새 세기다, 새 해다 해서 좀처럼 마음 다잡지 못하는 사람들의 뒷머리를 주가 사상최대 폭락이라는 증시 소식이 기습하고 있다.앨런 그린스펀이라고 하는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이 연임하기로 결정됐다는 것이 한국 증시에서 주가가 하룻동안 7%나 급락한 원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런 「그린스펀 쇼크」는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세계유일 초강대국일 미국의 위세와, 그 콧김아래 추위타는 나라들의 현실을 진감(震感)하게 하는 사례다.
전혀 별개의 사건도 있다. 미군기지에 폭발물 테러가 있을지 모른다는 첩보로 한밤중에 대피소동을 벌여야 했던 파주시민들의 이야기다. 결과는 오인소동이었다지만 유류와 화약저장시설이 만약 폭파되었다면 피해는 시민들에게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해제돼 밝혀진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정치범 집단처형 사실에 관한 보도가 같은 날 한국일보의 1면 머리기사다. 노근리사건 등 최근에 조명되고있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이어 우리 손으로 저지른 비극적 사건들도 들춰지는 셈이다. 그 어떤 쪽이든, 올해로 50주년인 6·25의 비극이 우리 국토의 산하 곳곳에서 새롭게 드러나고 정리되는 일은 오래 못이룬 우리의 사회통합을 위해서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린스펀_파주_6·25비극은 그러나 서로 연결되는 사안들은 아니다. 같은 날 신문지면을 함께 장식한 우연일 뿐인데, 굳이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를 찾자면 「미국」이 있다. 지나간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는데 이론이 없고, 한반도 운명과 깊이 고리지워져 있으며, 신자유주의라는 「팍스 아메리카나」이데올로기로 세계를 밀어붙이고 있는 힘을 볼 때 이 「미국」은 새 해 새 세기 새 천년의 담론에서, 특히 우리 현실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키 워드임을 알게 된다.
주목할 사실은 그중에서도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다. 21세기를 내다본 몇몇 석학들의 견해로는 범세계적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함께 이 신자유주의를 이겨내는 것이 인류의 가장 다급한 과제라고 한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 같은 이는 신자유주의를 「괴물」로 지칭하면서 극소수만이 「동화같은 번영」을 누리고 나머지 대다수를 「가난한 잉여인간」으로 전락시킨 이 정책은 민주주의와 인권조차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난 20여년간 부와 권력을 시장위주로 소수에 집중시킨 결과 극도의 빈부격차가 생겼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지구상에서는 지금 20억인구가 하루 2달러도 못되는 생계비로 살아간다는 것이 빈곤에 관한 통계다. 그 빈곤인구는 앞으로 50년 뒤까지 계속 늘어 40억명에 이르게 되고, 그대로 둔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혁명」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자크 아탈리가 전망하는 끔찍한 미래다.
문제는 빈민이 빈국에만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도 3,000만명이 배고픔을 겪는다. 빈부격차의 해소가 21세기가 당면한 최대 과제라는 이유들이다. 독설처럼 들리는 신자유주의 비판을 좀더 인용한다면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시장원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되고 초국적 기업들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부유한 특권층은 공적 자금을 지원받고 그 비용과 위험부담은 모두 사회로 이전되며, IMF는 외환위기에 처한 국가들을 「구제」한다면서 사실은 투자가들을 구제한 것이고, 그 국민에 많은 비용을 전가함으로써 은행가와 투자가들만 이익을 보게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비판을 다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고 있고 한국경제에 대해 『중요한 것은 이제 누가 한국을, 한국의 주요기업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되돌아 보는 것』이라는 지적은 귀기울여야 마땅하다.
이 시점에서 참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가, 어떤 모습이 보다 잘 사는 것인가 하는 판단이다.
아귀다툼의 생존경쟁에서 염치도 자존심도 없이 돈 많이 버는 승리자가 되는 일이 잘 사는 모습인가. 아니면 나도 중요하지만 남도 중요하다는 관용과 배려의 「더불어 사는 삶」이 진실로 잘 사는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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