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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석방우려 최고위층이 총살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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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석방우려 최고위층이 총살명령"

입력
2000.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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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대전과 대구 형무소 등에 수감중이던 정치범 수천명이 북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될 것으로 우려한 남한 정부에 의해 집단학살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다음은 당시 주한 미대사관 육군무관 밥 에드워드 중령이 작성한 비밀문서의 주요 내용이다.◇「한국의 정치범 처형」(2급비밀:R-189-50)

북한 라디오방송이 최근 남한에서 만행과 대량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주장들은 아마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전쟁발발 직후 남한 경찰에 의한 피의 처형들이 있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됐을 때 북한 인민군은 수천명의 죄수를 석방했다. 본인 판단에 따르면 정치범들이 진격해오는 적군에 의해 석방되지 못하도록 서울 함락 직후 수 주내에 수천명의 정치범들이 처형됐다.

의심할 바 없이 총살명령은 최고위층에서 내렸는데 정치범들은 전선이 있는 마을들에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포로에 대한 한국군의 총살집행은 전선에서 즉결처분으로 제한됐고 후퇴한 후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는 대체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대전에서 벌어진 정치범 1,800명에 대한 처형은 1950년 7월 첫째주에 3일간에 걸쳐 집행됐다. 사진은 극동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 소령이 육군무관의 라이카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무관사무실 요원에 의해 현상·인화됐다.

문서분류:비밀(SECRET), 신뢰도: 가장믿을 만함(A-1), 보고자: 육군무관 BOB E. EDWARDS, 보고일자: 1950년 9월23일

첨부 이 문서에는 처형장면을 찍은 사진 18장이 첨부돼 있는데 재소자들이 대오를 지어 땅에 쪼그려 앉아 있고 「논산읍」이라는 차량의 소속처가 선명히 보이는 트럭에서 경찰들이 내리는 장면, 군경이 처형을 위해 대열을 형성하고 있는 장면, 군경이 피살자 사이를 다니며 확인하는 장면 등이다.

◇「한국 육군헌병에 의한 처형」(3급비밀:R-55-51)

피살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중이던 사람들로 한국 육군 헌병들이 1951년 4월 어느 날 대구 인근에서 처형됐다. 사진은 주한미군군사고문단(KMAG) 소속 군사고문이 촬영했으며 육군무관실이 현상·인화했다.

문서분류:비밀(SECRET), 신뢰도: A-1, 보고자:육군무관 BOB E. EDWARDS중령

보고일자:1951년 5월3일

첨부 이 문서에 첨부된 사진 7장은 한국군이 재소자 여러 명을 들판으로 데려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한 후 육군헌병 1개 분대 병력이 일렬로 서서 총살형을 집행하고 흙으로 덮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도영박사는 누구인가

이도영 박사(52)는 제주도 4·3사태의 연장선상에서 1950년 8월 한국 군경에 의해 제주도에서 학살된 제주도민 이현필씨의 아들이다. 미국 영주권자인 이박사는 아버지의 부당한 죽음을 포함, 4·3사태를 둘러싼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해 왔으며 이번 문서도 그의 집요한 노력의 결과로 반세기만에 공개됐다.

이박사는 경북대 사범대학·대학원 교육학과 출신으로 미시간 주립대에서 상담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탐라대학에서 전임강사를 지냈으며 제주시 소재 플러스 생활복지연구소 공동연구위원으로서 한국과 미국을 왕래하며 4·3사태의 진실 규명에 몸바쳐 왔다.

/LA한국일보

■[4·3사태 학살목격 송재선씨] "전기줄로 묶은채 기관총 난사"

3일간 1,600명 죽여"… 우익전향밝혀도 사살

『구사일생처럼 살아난게 당시 상황을 증언하라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대전지역에서 좌익활동을 하다 1950년 7월 초의 좌익 대학살 과정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송재선(宋在璿·88·서울 서초구 서초동)옹은 당시를 증언하면서 치를 떨었다. 당시 대전 건국청년동맹위원장을 지내는 등 좌익활동을 했던 송옹의 기억으로 대전에서 학살된 사람은 1,600여명.

당시 대전서 벽돌공장 등 여러 기업체를 운영했던 송옹은 평소 친하게 지냈던 군간부로부터 한국전쟁 발발 사실을 알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송옹은 당시 좌익의 프락치역할을 했던 대전 용두동의 한 경찰관 집 다락에 몸을 숨긴채 15일 동안 피신했다.

다락에 은신한 지 10여일이 지난 7월14일. 송옹을 보호해주던 경찰관이 다급하게 다락을 가리고 있던 합판을 두드렸다. 『위원장님, 지금 군용차량이 대전교도소 수감자들을 실어나르고 있습니다』 대학살의 시작이었다. 대전교도소 등에 수감된 1,600여명의 좌익 관련 수감자가 대전 외곽 산래면 야산으로 끌려가 3일에 걸쳐 모조리 학살됐다. 『팬티만 입은 수감자들이 5명씩 전깃줄로 엮어져 차에 실려 끌려갔고 군인들이 구덩이 옆에 꿇어앉혀 놓고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송옹은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20일 인민군의 대전 입성으로 창고에서 나온 송옹은 산래명 학살지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구덩이가 사체로 메워져「움푹」 들어간, 「죽음의 땅」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곳은 『주민들이 낮에도 무서워 갈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송옹은 전했다. 송옹은『대전에서 좌익활동을 같이 했던 동료는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며 『우익으로 전향하겠다는 사람도 모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송옹은 이후 퇴주하는 북한군을 따라 월북했다가 59년 간첩활동을 위해 월남했다 체포, 18년을 복역하고 77년 만기출소, 현재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서 살면서 한글 속담 연구서적을 펴내는 등 한글을 연구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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