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후 '수렴청정' 설도「옐친의 사임은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대통령은 지난해초부터 주도면밀하게 정계 은퇴를 준비해왔으며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구랍 31일 사임했다고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1월1일자)가 보도했다.
이 잡지에 따르면 이른바 「사임 시나리오」의 발단은 지난해 4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의 「반기」에서 비롯됐다. 프리마코프는 당시 자금 부정유출 의혹을 받던 국영항공 아에로플로트에 대한 검찰 수사를 지시했다. 이 회사의 사장은 옐친의 장녀인 옐레나의 남편.
검찰은 「크렘린의 돈줄」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전독립국가연합(CIS) 집행위원장을 체포한데 이어 점차 사정범위를 크렘린쪽으로 확대하며 옐친과 그 패밀리들을 압박해 왔다. 더욱이 당시 프리마코프는 옐친을 압도하는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저지할 수도 없었다.
이때부터「옐친 패밀리」내에서 프리마코프 축출과 후계자 물색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옐친의 정치고문인 글레브 파블로브스키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차기 대선에 완전히 신뢰할 후보를 내세우고 적대적인 후보를 약화시키기 위한 조기사임 계획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때 낙점 받은 인물이 블라디미르 푸틴(47) 현 대통령 권한대행. 옐친은 지난해 5월 프리마코프를 해임하고 세르게이 스테파신을 총리로 임명했으나 3개월후인 8월 스테파신 마저 해임한 뒤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다.
푸틴은 제2 체첸전을 일으켜 인기몰이에 성공, 「푸틴당」으로 통하는 통일당은 지난달 19일 총선에서 약진한 반면 프리마코프의 조국-전러시아당은 겨우 체면만 유지했다. 옐친 퇴임의 제반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푸틴은 4일 국영 ORT TV와의 인터뷰에서 『옐친은 사임발표 열흘전에 사임계획을 통보했다』면서 『옐친은 다음 대선이 자신의 희망대로 진행되길 원했다』고 말했다.
「포스트 옐친」 시나리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옐친 의 퇴임후 정치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기구」가 크렘린 내에 조만간 설치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옐친정권 시절 대통령부 부장관을 지낸 블라디미르 셰프첸코가 주도하는 이 기구는 의전국 보도국 경비국 외교국 등으로 구성, 옐친의 외유(外遊)를 포함한 정치·사회 제반 활동을 보좌할 예정이다.
요미우리(讀賣) 신문은 이와 관련, 옐친이 과거 일본의 막부시대때 상황(上皇)이 천황의 거처인 원(院)에서 천황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원정(院政)」을 도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판 수렴청정(垂簾廳政)」인 셈이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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