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일단 진화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정부정책의 일관성이나 신뢰성이란 측면에서는 과거 정부에 비하여 나아진 점을 찾기가 힘들다. 환란의 대처과정에서 경험하였던 숱한 시행착오 중에서도 대기업의 「빅딜」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최근에는 과거 불량신용에 대한 대사면 발표로 정부정책의 일관성을 스스로 저버린 셈이 됐다. 작금의 대사면이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가상한다면 이번 사면으로 구제된 사람들은 앞으로 정직하게 자기신용을 쌓아 올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유인하는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
부적절한 신용행위를 통하여 당장의 이득을 취하고는 또 다른 사면으로 신용복원을 꾀하려는 사람들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고지식하게 신용을 쌓아 온 계층은 그렇지 않은 불량신용자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보게된다면 앞으로 더이상 자기신용을 쌓으려는 고달픈 노력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경제에 가장 낙후된 분야 중의 하나인 금융부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금융기관의 성공적 구조조정과 보다 선진화한 금융관행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이에 더하여 개인 및 기업들이 신용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정책 또한 내실있는 금융발전을 위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마도 정부는 이번만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과거의 불량한 신용기록을 삭제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부정책의 신뢰는 구호에 의해서만 구축될 수는 없다. 정부의 구호는 목전의 정치적 동기나 편의에 의해서 쉽게 변질되어 왔음을 수없이 경험하였다.
현 정부도 미래에 또다시 불량신용자가 누적된다면 또다른 사면의 유혹을 받을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지금과 같이 선거가 코 앞에 다가올 경우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정부가 이러한 유혹을 과감히 물리쳤을 때 하나 둘 쌓이게 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정부의 신뢰가 중차대한 이유는 개인의 현재 경제행위는 미래와의 연관속에서 이루어지며 정부의 정책은 개인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즉 정부가 일관된 정책을 신뢰성 있게 추진해야만 개별 경제주체들은 미래에 어떠한 정책이 수행될 것인가를 확신하고 그에 맞추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환경이 정부정책이 그 효과를 십분 발휘하는데 절대적인 것이다.
특히 일반적 거시경제정책에서는 정부의 신뢰성 및 일관성은 그 정책 효과를 좌우할 정도로 중차대함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경험적으로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다수의 경제주체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계획을 수립하고 이러한 계획이 실현될 수 있는 경제여건이 형성되었을 때 그 경제는 지속적이고 안정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미국 경제가 오늘 같은 안정된 성장을 이어 가는데는 미 연방준비제도위원회(중앙은행)의 신뢰성있는 정책집행이 필수적이었음은 모든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 수장인 앨런 그린스펀은 미 경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러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철저한 임기보장이란 제도적 장치에도 기인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존중하는 행정부와 그에 상응하여 미 중앙은행이 과거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던 일관된 정책집행 및 그에 따른 일반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신뢰성에 있다.
새 천년이 시작되는 올해부터 한국경제를 보다 안정성있는 경제체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체질 자체를 전환시키는 구조적 노력에 못지 않게 정부정책의 신뢰성과 그에 따른 일관된 정책집행의 중요성을 명심해야 한다.
-이만우·고려대 교수·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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