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화가 서공임씨 "日은 독기가 눈에서려"『용의 뿔은 사슴의 뿔을, 머리는 낙타를, 눈은 토끼를 닮아야 해요. 머리에 달린 귀는 순한 소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마는 뱀, 배는 이무기를 닮아야 합니다. 또 비늘은 물고기 모양, 발톱은 하늘을 나는 매를 닮아야 하고, 발바닥은 무서운 호랑이를 닮아야 하죠』
민화 화가 서공임(40)은 평범한 얼굴이다. 세속적인 그림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다. 나서지도 않으며 조용하고 잔잔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따뜻함이 흐른다. 그러나 강한 힘도 엿보인다. 허세와 가식은 보이지 않는다. 곱고 착하고 너그럽고 무던해 보인다.
『한국의 용은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환하고 밝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중국의 용은 권위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일본 용은 눈에 독기가 서려 무사 기질이 그대로 묻어 나오죠』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선조들의 진솔한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던 우리의 그림, 민화(民畵)의 특성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민화그리기 20년째.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수집하고 가장 넓게 섭렵했던 조자룡(에밀레 박물관 관장)씨가 죽어가는 민화를 살려낸 사람이라면, 서공임은 그가 정리해 낸 한국 민화를 확대, 재생산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대표적 화가로 꼽을 수 있다.
용의 해를 맞아 현대백화점 무역점(9일까지)과 신촌점(12일까지) 현대아트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는 그의 용그림 초대전에는 100호짜리 대형그림 12점을 비롯, 모두 36점이 전시되고 있다. 2년만에 세번째 개인전.
『이 세상 아무도 본 일이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이기에 용그림만큼 그리기 쉬운 것도 없다고들 생각하지요. 하지만 사실 용그림만큼 까다로운 규정을 갖고 있는 그림도 없지요』
20년 동안 민화의 중요한 화제(畵題)중 하나인 용(龍)을 1,000마리 넘게 그리며 청룡(靑龍), 황룡(黃龍), 운룡(雲龍), 쌍룡(雙龍), 12지룡, 문자도 속의 용 등 여러가지 용을 다양한 구도 속에 담고 있다. 그는 구름 속에서, 안개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의 다양한 모습을 담기 위해 신륵사 다층석탑(황룡), 경복궁 사정전 내부벽화(운룡),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지에 있는 무학대사의 묘탑(운룡), 근정전(쌍룡), 운현궁(오조룡·五爪龍), 이화여대 박물관(황제룡·皇帝龍)등 용이 있는 곳이면 동서남북 어디든지 찾아갔다.
전통 민화는 으레 전래 민화에만 의존해 왔지만 그는 무학대사의 묘탑 하단에 있는 부조(사리를 모신 탑)를 작품의 소재로 삼거나, 고구려 고분 벽화의 황룡을 재현하면서 편편한 화선지 대신 요철지의 올록볼록한 질감을 사용, 고분 벽화의 옛스러움과 생동감을 강조하는 등 개성있는 용의 세계를 표출해내고 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 교수는 『숙달된 필묵법, 강한 설채법으로 2년전 호랑이 그림 전시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변용과 창작에 대한 시도가 엿보인다』고 말했다.
그녀가 민화를 시작한 것은 19세. 고등학교 3학년때 물감을 사러 우연히 화방에 들렀다 「민화 배울 분 모집」이란 광고를 보고 호기심으로 찾아간 곳이 모란도, 장군도, 십장생도같은 「수출그림」을 그리는 곳이었다. 미술대학 가는 것도 포기하고 그곳서 7년간을 끈기로 버티며 그림을 그렸다. 83년엔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한 원화를 복사해내는 작업을 해달라는 제의를 받고 1년간 용인으로 출퇴근하며 민화 원화 수백점을 모사하는 일을 했다. 덕분에 안 그려본 민화가 없을 정도.
「베끼는 연습」을 끝낸 후에 본격적으로 민화에 매달려보겠다는 욕심을 갖고 홍익대 송수남교수, 민화화가 송규태씨, 조자룡씨를 찾아다니며 수묵화의 기술과 민화의 이론을 터득해 나갔다. 당시 함께 민화 그리던 친구들이 서넛 있었지만 모두 중도에 포기하고 그녀만 끝까지 민화를 놓지 않았다. 옛날 화공들이 군주들로부터 총애를 받듯, 그의 그림은 감사원 , 여성개발원, 부산여대 박물관, 부산 하얏트 호텔, 제주 그랜드호텔 등 공공기관은 물론 개인소장가들로부터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동안 민화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민화를 한낱 베끼는 그림으로만 여길뿐 민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면서 『민화에 시간을 투자하면 할수록 소박하고 정적이면서도 사려깊은 한국인의 정서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대학원 예술사학과에서 연구과정에 있으면서, 연세대와 동국대 사회교육원의 강사로 민화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용 발가락수가 그림값 결정한다
흔히 용그림에 보이는 용은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용의 발가락 수는 그림에 따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그려전 용그림에선 용의 발톱이 4개 이상. 반면 중국 용의 발톱은 5개.
다섯은 동양 오행사상에서 가장 완벽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용의 발톱 5개는 황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는 오조룡(五爪龍)을 썼다. 그러나 중국 황제 아래인 조선의 왕은 한단계 아래인 4개밖에 쓰지 못했다. 그러나 효종 때에는 오조룡을 그리기도 했다. 효종은 북벌계획을 세워 중국 청나라를 치려 했던 왕이다. 고종부터는 우리나라의 용 문양에서도 정식으로 5개의 발가락이 쓰이기 시작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집안리 4호무덤)에 그려진 황룡은 3개의 발톱, 조선 성종 세워진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225호) 기단부에 부조된 운용의 발톱은 5개이다. 경복궁 근정전 천정의 쌍용은 무려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다. 중국황제의 상징이 오조룡이라면 그보다 더 높은 대한제국의 황제는 칠조룡이라는 뜻이 담긴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운현궁에 소장된 고종황제가 썼던 흉배의 용그림엔 발가락이 5개가 그려져 있다. 한편 왕세자는 발가락 4개의 사조룡 흉배를 사용했다.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민화나 용 그림 도자기의 경우 제작시대가 같고, 크기나 보관 상태 역시 우수하다면 그림값을 좌우하는 것은 용의 발가락 수다. 발가락 다섯개의 황제를 상징하는 오조룡 그림이 고가라는 것이다. 9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선 발가락 5개가 달린 용그림 청화백자 항아리가 13억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다. 김종춘 한국고미술협회 회장은 『물론 발가락수보다는 제작년도가 그림값을 좌우한다』면서 『도자기에 그려진 용그림의 경우 15-16세기엔 발톱이 3개, 17-18세기엔 발톱이 4-5개로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송영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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