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하니 아까 그 놈보단 연하겠다. 피를 쫙 빼라…』 며느리가 시장에서 식사거리로 고기라도 사 온 게 아니다. 비를 피해 방금 집으로 찾아 온 사람을 잡아 그렇게 요리하라는 시어머니의 말이다. 달동네까지 잠기는 원인 모를 대홍수로, 쥐들만 득실대고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극단 76단의 「쥐」는 식인(食人)을 소재로 한 연극이다. 마침내는 사람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도록 내몰린 사람들. 삶이란 결국 딴사람 잡아먹기 아니겠느냐는 염세적 시선이 깔려 있다. 그러나 실제 극에서는 경쾌한 진행,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엉뚱한 대사, 밝은 무대 등으로 76단(대표 기주봉) 특유의 활기가 넘친다.
정확히 언제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극이다. 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는 구경꾼 뒤에서 아들이 웅숭그리고 있다, 어슬렁 걸어 나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첫 멘트를 내보낸다. 『낡고 상처입은 오늘은 오늘로 족합니다…』 이 집에 용케 남아 있던 무선송신기로 내보내는 방송이다. 희생자도 그 방송을 쫓아 왔다. 이어 어어부 밴드의 기괴한 뽕짝. 일상과 가상의 점이지대, 그 위태로운 경계에 이 연극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듯.
등장 음악 또한 독특하다. 찌직대는 LP 음반에서는 초창기 블루스 가수 존 리 후커의 나른한 음성이 얹혀 온다. 음악의 복고주의는 작품상의 컬트적 염세주의와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매트릭스」 등 인류의 미래상을 그린 최첨단 영화가 지극히 기계적 사운드인 테크노를 까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 극은 우리 시대를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IMF 한파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 전이었던 지난해 2월 초연 당시, 관객들은 이 황당한 연극을 유쾌한 코미디처럼 웃으며 봤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옥죄는 지금. 관객들은 현실을 패러디한 기괴한 드라마를 보는 듯, 웃음기가 가셨다.
눈만 뜨면 밀레니엄, 뉴 밀레니엄…, 21세기가 마치 만능의 해결사인 양 호들갑이지만, 결국 무엇이 달라지겠느냐는 무언의 항변을 그 진지한 표정들은 말한다. 박근형 작·연출. 9일까지 혜화동1번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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