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기관사였다.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철도청에 다니는 사람을 둔 가족에게는 전국 어느 곳이라도 무임승차할 수 있는(좌석은 없지만) 차표가 나왔다. 그 손바닥만한 노란 기차표 덕분에 우리 가족의 이동수단은 오로지 기차였다. 서 있을 자리조차 없어 어른들 발등을 수없이 밟으며, 내릴 때는 창문으로 기어 나와야 했던 명절에도 아버지는 태연하게 기차를 타라고 하셨다. 내가 살던 곳에서 다섯 정거장만 가면 되는 할머니 댁에 주말마다 내려가던 엄마의 손을 잡고, 조금 커서는 내가 동생의 등을 떠밀며 탔던 그 기차에는 많은 기억이 담겨 있다.하지만 기차 타기가 일상이었던 내게는 기차라고 하면 긴 여행, 혹은 이별을 떠올리는 대개의 사람들처럼 낭만적인 감상은 없다. 내가 탔던 기차에는 촌부들의 구수한 입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숱한 얘깃거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 기억 때문일까.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상을 탔던 그림도 기차를 소재로 한 것이었고, 이제 20여년이 흐른 뒤 글로 처음 상을 받은 것도 공교롭게 기차역을 배경으로 했다. 어찌 보면 서른이 넘도록 유년의 기차에서 아직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제 낯선 기차역에 내려 새로운 세상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설레는 감정 한편에는 두려움이 있다. 오랫동안 그 큰 기차를 사고없이 운행한 아버지처럼, 나도 좋은 글로 아이들에게 올곧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부족한 글을 뽑아준 것은 더 노력하라는, 다른 욕심은 버려도 글에 대한 욕심은 키우라는 뜻이라 생각된다. 심사위원님에게 감사드리며 그 가르침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다. 그동안 무슨 일이든 말없이 힘이 되어준 가족과 글쓰기를 독려한 선배에게도 감사드린다.
약력
68년 충남 도고 출생
순천향대 영문과 졸업
사보(社報)대행사 「신라 애드」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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