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난 보리스 옐친(68) 전 러시아 대통령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뉴 밀레니엄을 맞았다. 옐친은 『최근 몇년동안 이처럼 활기찬 새해를 맞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고 크렘린이 전했다.주변의 분위기도 좋은 편이다. 후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권한대행이 무리없이 권력을 이어받았고 자신의 「명예로운 퇴장」에 대한 칭송도 나오고 있다. 푸틴은 「약속대로」 자신과 가족의 영구 면책을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령에 서명, 「안전한 퇴장」을 법적으로 보장했다. 옐친은 또 러시아 초대 대통령 자격으로 푸틴과 함께 6,7일께 베들레헴의 예수탄생 2000년 기념행사에 참석한다. 한마디로 크렘린의 「포스트 옐친」 시나리오가 안착하는 듯하다.
하지만 옐친의 퇴로(退路)가 결코 장밋빛 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3월 대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옐친과 그 가족의 각종 부패 의혹이 도마 위에 오를 게 분명하다.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 등 대선 후보들은 천청부지로 치솟은 푸틴의 인기를 깎아내리기 위해서라도 옐친의 전력을 들먹일 것이다. 3일 발매된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신호는 스위스 금융당국에 의해 지난해 동결된 12개 계좌의 옐친 연계 의혹을 다시 제기했다. 이 잡지는 이들 계좌에는 무려 1,500만달러 이상이 입금돼 있다고 전했다.
대선전이 상호 비방전으로 치달으면 그 화살은 옐친에 집중되고, 푸틴은 상황에 따라 「옐친 보호막」역할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 「푸틴 신드롬」의 진원지인 체첸전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푸틴은 그 돌파구로 「홀로서기」를 선언할 지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선거가 혼전양상으로 치달을 경우 푸틴 권력의 뿌리인 이른바 「옐친 패밀리」 사이에 내분이 일어날 수 있다고 AFP 통신은 전망했다.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 40여명의 「크렘린 마피아」는 이미 푸틴에 대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일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옐친의 둘째 딸이자 이미지 담당 보좌관으로 크렘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타티야나 디야첸코가 조만간 퇴진할 것으로 알려지는 등 패밀리 재편이 이미 시작됐다.
현재 모스크바 인근의 휴양지인 고리키9에 머물고 있는 옐친은 앞으로 국가로부터 받은 다차(별장)나 흑해 등의 안가(安家)에서 「불같은 성격」을 죽이며 건강을 돌볼 가능성이 높다. 그에게는 재직시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봉급과 의료보험, 개인비서, 경호원 등 전관 예우가 주어진다. 하지만 러시아가 그를 편히 쉬게 놔두지 않을 지 모른다.
*사진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전관예우로 받는 모스크바 교외의 별장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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