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새천년맞이 행사를 보며 이 순 원날씨는 매우 차고 춥다. 새 천년이 시작되는 시간 서울의 기온은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도 춥게 느껴지지 않는 한밤, 어제와는 분명 다른, 아니 달라야 하는 새천년맞이 축제 현장에서 나는 우리에게 시간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한 세기가 바뀌고, 새로운 연표의 새로운 천년이 한발 한발 다가오는 그 시간들이야말로 우리에겐 또 다른 역사적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순간을 기다리며 그 어느때보다 내 마음을 경건하게 해야 할 그 시간, 나는 경망스럽게도 얼마 전 외국의 어느 작가가 새로운 천년에 시보다 짧게 쓴 어떤 엽편소설 하나를 떠올렸다.
1999년 12월 31일 밤, 한 남자가 밖에 나가 한 여자를 꼬드겨 자기 방으로 데리고 온다. 밤은 깊어가고, 남자는 여자를 애무한다. 여자는 별 반응이 없고, 남자는 더 열심히 여자의 몸을 애무한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남자가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이 여자가 20세기 오르가슴을 느낄지, 아니면 21세기에 오르가슴을 느낄지 그것이 문제라고.
어쩌면 그는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천년에 대한 세계의 호들갑을 농담처럼 짧은 글 하나로 경계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 우리에게도 그런 한 시절이 있었다. 입만 열면 『86, 88』을, 그래서 『해가 떠도 86, 달이 떠도 88』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만 치르고 나면 저절로 무엇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질 것처럼 여겼던 집단 최면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날들에 대한 희망을 전과 다른 각오가 아니라, 그냥 입버릇으로만 소비하고 말았던 게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하루 하루의 날도 어제와 오늘의 의미는 다르다. 하물며 한 세기가 새롭게 시작되고, 거기에 새로운 천년이 더해지는 이 순간들은 분명 어제의 시간과 달라야 하고, 또 지난 세기, 지난 천년의 시간과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냥 시간이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맞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새 천년이 시작되는 그 시간, 광화문 새천년맞이 현장엔 10만여명이 넘는 인파가 미리 나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난 세기의 반목과 갈등을 끊어보내는 이별 의식으로 1,999개의 평화의 연을 날린 다음, 우리는 다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입을 모아 다가올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에 대한 카운트다운을 했다. 어두운 밤, 우리의 함성을 하늘은 들었을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즈믄해 우주의 시계 위로 빛이 왔다. 그 빛은 어제 오후 변산 격포에서 지난 천년의 마지막 빛을 채화하여 그 길로 다시 서울로 달려와 새 천년을 밝히는 평화의 빛이요, 영원의 빛이라고 했다.
그리고 생명이 왔다.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우리가 가장 먼저 본 것은 그 빛과 함께 이 땅에 온 새로운 생명, 텔레비전과 인터넷 생중계로 본 우리의 미래, 밀레니엄 베이비의 탄생이었다.
그래, 이 세상에 새 생명의 탄생보다 더 소중하고 축복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어디 있으며, 그 첫울음만큼 우렁찬 새 시대의 희망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우리의 새로운 세기, 새로은 천년은 밝아오고 나는 그 시간의 축제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는 다시 경계해야 한다. 축제는 자칫 어느 한 시간을 경계로 무언가 달라진 세상이 어제와 다른 나와 우리를 만들어줄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시간이 우리를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다. 어제와 다른 우리를 가꾸어가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뿐인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하여 우리가 그것을 지배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새 천년 저 영원의 불처럼 이제 우리가 저 빛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먼 훗날, 우리가 아닌, 오늘 우리 앞으로 온 새 생명이, 그리고 그들의 후손이 오늘 우리가 맞이한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야 할 것이다. 진정 그들은 빛의 주인이었고, 시간의 주인이었다고.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자랑스런 후손이라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