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E마트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국내 산업화 초기인 194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쏟아졌던 상품중 현재까지 판매되는 인기 장수상품을 선정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상품전」이 열린 것.뉴 밀레니엄의 문턱에서 이들 장수상품의 의미는 각별하다. 먹거리와 쓸거리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면서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온 「역사」가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 45년 선보인 해태 연양갱은 지금도 조그만 가게에서 가끔씩 만날 수 있다.
듣고 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추억 속으로 젖어들게 만드는 20세기 장수상품은 또 어떤게 있을까.
■롯데 칠성사이다
『슈슈슈바 슈리슈바…』 51년 선보인 칠성사이다의 CM송은 처음 듣는 사람도 이내 귀에 익을 만큼 재미있는 의성어를 사용했다.
어릴적 소풍길이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내놓았던 칠성사이다는 국산음료중 가장 오랫동안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장수상품. 칠성사이다의 저력은 우수한 제품력. 순수하게 정제된 물로 생산되고 레몬이나 라임과 같은 천연향만을 사용, 인체에 유해한 카페인이나 인공색소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
반세기 가깝도록 우리 입맛에 맞는 국산음료의 자존심을 지켜온 칠성사이다는 90-97년까지 연평균 8.9%라는 높은 매출성장률을 기록했다. IMF로 탄산음료 소비가 대폭 줄어든 지난해에도 전년보다 4.6%가 증가, 2,100억원 어치가 팔렸다.
■대상 미원
56년 처음으로 선보인 미원은 국내조미료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20년 가까이 인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고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이 평생 이루지 못한 것 중 하나로 미원을 꺾지 못한 점을 꼽을 만큼 소비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은 제품.
삼성의 계열사였던 제일제당은 조미료 「미풍」을 내놓고 미원을 따라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끝내 추월하지 못했다.
70년대 후반 제일제당이 차세대 종합조미료인 「다시다」를 내놓으면서 어느정도 처지긴 했지만 명맥은 이어지는 상태. 한시대를 풍미하면서 소비자들의 사랑을 한껏 받은 셈이다.
■크라운 산도
99년 TV드라마 「국희」의 성공으로 새삼 주목을 받은 크라운 산도는 사실 태어난 지 38년 된 장수식품. 크라운제과가 탄탄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게 61년 선보인 크라운 산도 때문이다.
산도는 윤회장이 직접 설계부터 쇠깎는 직업까지 하면서 8년간의 연구끝에 개발한 제품. 국내 최초로 비스킷 사이에 크림을 집어넣은 볼록무늬 과자다.
산도는 국민 1인당 연간 50개씩 소비될 정도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크라운제과의 외형을 확대하는 기틀이 됐다. 샌드비스킷의 대명사 산도는 지금까지도 월 7-8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효자상품이다.
■모나미 153볼펜
30대 이상 세대에게 모나미 153볼펜은 필기구의 대명사다. 모나미 볼펜이 세상에 선보인 해는 63년. 날만 새면 신제품이 나오고 외제품이 범람하는 요즈음이지만 「잘살아보세」라는 구호가 떠나지 않던 60-70년대엔 모나미볼펜 밖에는 택할 만한 「쓸것」이 마땅찮았다. 0.7㎜ 모나미 153볼펜의 볼펜심만 따로 팔던 때도 있었다. 심만 갈아끼울 수 있고 볼펜 몸통과 뚜껑은 그대로 쓸 수 있도록 한 것. 알뜰파를 위해서 선보인 아이디어다. 회사명 모나미는 프랑스어 「Mon Ami」를 쓴 것. 「내 친구」라는 뜻이다. 세월이 흘러 볼펜 하나로 경영을 이끌었던 회사 모나미도 종합문구업체로 거듭났다.
■애경 트리오
66년 선보인 애경산업의 주방세제 트리오도 IMF로 저력을 새삼 확인한 제품. 97년 시장점유율이 27%까지 떨어졌던 트리오는 이듬해 31.5%로 급신장하면서 1위로 뛰어올랐다.
88년 40%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던 트리오는 기능성 세제에 밀려 시장에서 퇴출되는 분위기였으나 IMF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복귀했다.
순식물성 원료를 사용해 이틀만에 90% 이상이 분해되는 높은 생분해도 등 품질이 우수한 데다 가격까지 저렴하기 때문. 트리오는 3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연간 140만병이 판매되고 있다.
■농심 새우깡
새우깡은 71년 첫선을 보인 뒤 28년간 인기를 누려온 최장수 인기스낵이다. 고소하고 짭짤해서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새우깡은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아왔다.
쌀이 부족했던 당시의 현실 때문에 밀가루를, 국내연안에서 많이 잡히는 시바새우를 사용한 이 제품은 시판 첫해 매출이 20만박스에서 다음해 425만박스로 늘어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한마디로 없어서 못팔았을 정도.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가요」로 시작되는 CM송의 히트로 제품 인기도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90년대 들어 다양한 먹거리가 쏟아져 나오면서 판매가 다소 부진해졌던 새우깡은 IMF 한파가 외려 호재로 작용, 푸짐한 양을 앞세운 인기상품으로 급부상했다.
■오리온 초코파이
동양제과가 초코파이를 내놓은 것은 74년. 당시 100원이었던 초코파이는 「고급 간식」에 속했다.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라는 별명과 함께 장수식품의 명성을 유지했던 초코파이도 시간의 힘에는 약한 법. 돈가치도 떨어지고 매출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초코파이는 90년 「정(情)」이라는 광고전략을 새롭게 선보였다.
보통 사람들의 가슴뭉클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주변의 작은 사랑을 전한 것. 정 시리즈가 나오면서 경쟁사가 내놓은 수많은 유사제품도 따돌리게 됐다.
초코파이를 사려고 가게에 갔다가 「오리온」 상품이 없으면 다른 가게로 가는 경우가 흔했다. 99년 오리온 초코파이의 상품인지율은 73.3%에 달했다.
■유한락스
요즘은 보편화한 락스가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것은 75년. 유한양행이 살균·소독·악취제거제 「유한락스」를 내놓으면서부터다.
80년대초 유한락스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자 눈독을 들인 업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락스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비자는 그러나 이런저런 살균제보다 「처음으로 나온」 유한락스를 기억했다. 다른 제품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
제각기 최고의 품질을 내세웠지만 어떤 제품도 시장에 안착하지 못했다. 「최초의 상품」으로 소비자의 기억을 선점한 유한락스는 수십년간 부동의 정상을 고수할 수 있었다.
■해태 맛동산
과자의 생명은 6개월-1년. 대부분 나온지 1년이면 매장에서 사라진다. 맛동산은 그러나 75년 판매 이후 진열대에서 밀려난 적이 없다. 이런 까닭에 해태제과는 맛동산을 「국민과자」라고 부른다.
맛동산은 밀가루 반죽을 막대모양으로 만들어 튀긴 다음 표면에 당액을 입히고 땅콩가루를 뿌린 스낵. 고소하고 달콤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맛동산은 특히 IMF 체제 이후 「불황 속 특수」를 구가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배고팠던 시절 즐겨먹던 맛동산이 소비자들을 자극한 데다 값에 비해 푸짐한 양도 장점이었던 것.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10억원대에 그쳤던 월평균매출이 98년 이후 20억-30억원대로 늘어나면서 맛동산은 절정기를 맞고 있다.
■피죤
섬유유연제가 뭔지 물어보면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 그러나 피죤이라고 말하면 『아-빨랫감을 부드럽게 해 주는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피죤이 섬유유연제가의 대명사가 된 것. 피죤은 무엇보다 「철저한 브랜드 관리」를 통해 소비자의 기억속에 선명하게 자리잡았다.
74년 설립한 회사 ㈜피죤은 78년 선보인 섬유유연제 제품명을 회사이름과 같게 하는 「회사이름=브랜드」전략을 썼다. 해마다 꾸준하게 품질을 개선해 선보이는 신제품도 오늘의 피죤을 만든 밑거름.
「빨래엔 피죤하세요」라는 독특한 광고카피도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명사 「피죤」을 동사형으로 바꾼 것이다. 이 광고카피는 20년동안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꾸준한 판촉 시장선점이 '장수비결'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부터 지금까지 50년 이상의 명맥을 유지하는 상품들의 공통점은 「시장 선점」이다. 「최고의 제품」보다는 「최초의 제품」이 소비자의 기억을 선점한다는 것. 이들 제품은 브랜드 네임이 그 상품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경우가 많다. 조미료는 미원으로, 섬유유연제는 피죤으로 불리는 게 대표적인 사례. 소비자의 기억을 「먼저」 빼앗는 제품이 오래갈 수 있다.
광고나 판촉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도 장수의 비법이다. 꾸준하게 판매되는 「스테디셀러」보다는 갓나온 신제품의 광고판촉에 열을 올리는 게 보통의 성향. 장수상품들은 그러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광고를 계속 바꾸는 게 특징이다.
칠성사이다의 경우 코카콜라의 색소와 유해성분 논란이 벌어졌을 때 즉시 경쟁사의 약점을 이용한 광고전략을 펼쳤으며, 오리온 초코파이는 상품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해 줄 수 있는 메시지로 「정(情)」을 선정, 시리즈 광고를 제작했다.
같은 상품이라도 종류를 달리해 개발하는 제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향의 종류를 달리해 다양한 섬유유연제를 꾸준하게 내놓는 피죤은 지금까지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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