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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본주의 꽃피운 '광고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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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본주의 꽃피운 '광고100년'

입력
199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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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사실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한 수단이었다. 매체의 힘을 빌려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였던 광고는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아 변화하는 문화를 반영하는 최첨단 사업이 됐다. 상품 구매를 이끌어내고 기업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광고가 또하나의 상품과 기업으로 바뀐 것. 「자본주의의 꽃」이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셈이다.지난달 열린 99 한국광고대회에서의 발표에 따르면 국내 광고의 역사는 개화기와 함께 시작된다. 강화조약에 따른 개항에서부터 서울올림픽 이후 개방시기까지 근대 광고가 지나온 발자취를 짚어본다.

■개화기·일제시대·광복 이전까지(1876-1945)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는 113년전인 1886년 한성주보에 독일계 무역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이 게재한 신문광고다. 24줄짜리 한문이었던 이 광고는 두개면에 걸쳐 실렸다. 세창양행이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광고(廣告)」대신 중국식 표현인 「고백(告白)」을 썼다. 이후 신문과 잡지광고, 전차·전단·전주광고와 시가판촉행진, 간판업자의 신문광고 등이 나타났다.

1910년 한일합방 뒤 업종별, 광고주별 광고단가에 차등이 있는 일본식 광고제도가 정착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제약광고료 우대제도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시기. 1927년 유한양행 개업광고, 백보환선생의 「전조선 1,000만 부인이여 각성하자, 1,0000만 남자에게 엄중항의하자」는 선동적인 헤드라인, 담배피는 사람을 타깃으로 삼은 일본의 「스모가치약」등이 당시 눈에 띄는 광고. 이렇듯 꾸준하게 성장했던 광고는 광복을 앞두고 일본의 통제체제가 극단화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해방·한국전쟁·방송매체 시대까지(1945-1967)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신문이 1일 4면으로 발행되는 데는 해방 이후 10년이 걸렸다. 당시의 신문사 광고상황은 열악한 상태. 50년대에 이르러 방송시대가 개막, 한국 최초의 라디오 CM송 「진로」가 59년 라디오전파를 탔다.

1964년 「조일광고상」이 제정돼 동아제약의 프리마가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1965년에는 서울약품의 원기소가「중앙광고대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증폭했던 정기간행물은 5·16혁명뒤 정비됐다. 한때 308개의 통신사, 15개의 일간신문사가 9개사, 35개지로 크게 줄어들었던 것. 50년대 광고 역시 병원, 의약품 광고가 가장 많았다.

■광고대행사 대두시대(1968-1979)

68년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한국상륙으로 광고대행업 시대가 개막됐다. 「제일기획」, 「오리콤」, 「연합광고(현재 MBC애드컴)」등 3개 대행사가 출범한 것. 개화기 이래 최대 광고업종이었던 제약은 이 시기 식품, 음료, 가전제품 등에 자리를 내주게 됐다. 이 시기에는 급속한 TV 보급에 따라 TV가 신문 다음가는 매체로 등장했다.

코카콜라가 「광고캠페인」이란 개념을 한국에 도입한 것도 이 때다. 74년 일본 ACC광고상에 출품한 일동제약의 아로나민광고 「등대수」는 아시아지역 극장부문상을 받았다. 한국광고 최초의 바깥나들이였다. 77년에는 코미디언 구봉서와 곽규석의 유명한 농심라면 CF 「형님먼저 아우먼저」가 등장, 광고카피가 그대로 유행어가 됐다.

■TV컬러화·언론통폐합·한국방송광고공사(1980-1987)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언론기본법이 제정돼, 일간신문은 29개로 줄고 방송은 공영화했다. 색의 혁명을 일으킨 TV의 컬러화도 광고사의 전환점. 흑백세계 속에 살던 소비자들이 화려한 「색깔광고」를 접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한국방송공사도 설립돼 모든 방송광고 판매를 독점하게 됐다. 금성사(현재 LG전자)의 하이테크 컬러TV 광고가 81년 TV컬러화 이후 최초로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주최한 한국방송광고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1985년을 제외하면 1981-87년까지 6년동안 광고비는 두자리 성장을 계속했고, 87년에는 1조원에 가까워졌다. 시대상을 잘 반영한 것으로 극찬받은 쌍용의 「도시락광고」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개방시대(1988-1999)

87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인쇄매체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당시 30개 일간지가 92년 100개를 넘어섰을 정도. 96년 광고비는 5조6,000억원에 이르렀고 90년대 중반에는 한국이 세계 10대 광고비보유국 리스트에 올랐다.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광고업계가 기세를 꺾은 것은 IMF 외환위기가 닥친 97년. 이때 광고비는 처음으로 전년대비 마이너스4.2%를 기록했고 98년에는 다시 35% 감소했다. 2년여동안 거듭됐던 광고업계의 도산·부도·감원바람은 68년 광고비 추계가 시작된 뒤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렇듯 큰 타격을 입었던 광고업계는 99년 들어 회복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 광고의 특징은 개방시대를 맞아 다양한 표현방식을 선보인 것. 대표적인 것이 밀크삼바드의 「나체광고」다. 특히 90년대 들어 쏟아진 서비스광고는 표현수단을 예술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요즘에는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이나 비디오아트 기법이 광고에 흔히 사용되는 수준. 다시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광고는 새로운 세기를 맞아 「주류 영상예술」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점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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