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학은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 사상이 기둥이 되어 논쟁하면서 발전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여기까지는 좋으나 사람들은 더러 이런 논쟁이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이 대를 이어가며 벌인 당쟁에까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믿는다.조선의 사상이 주자학 일색이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둘러싼 논쟁이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을 낳아 당쟁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하지만 한국철학자의 생각이 아니다. 600년 넘는 고려와 조선의 유학사를 이런 식으로 간명하게 정리하고, 종내는 국민성까지 들먹여 필연성을 논한 사람은 제국주의 일본의 철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1878∼1967·사진)였다.
18년 동안 경성제국대 교수를 지내며 조선 유학을 연구하고 꽤 많은 논문까지 썼지만 그의 글은 여지껏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 고작 식민사관에 따라 조선의 유학을 확대 해석하고 그 논리를 열심히 전파한 사람이라며 묻어버리거나, 반대로 음으로 양으로 그의 논리를 전수받아 재생산하는 형편이었다.
서울대 강사로 한국철학을 전공한 조남호씨가 최근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 관련 논문 몇 편을 번역해 「조선의 유학」(소나무 발행)을 냈다. 책에는 「조선유학사에서 주리파·주기파의 발달」 「조선 유학 대관」 「이황의 가장 충실한 조술자 권상일의 학설」 「조선의 양명학파」 「조선 학자의 토지 평분설(平分說)과 공산설(共産說)」 「정다산의 대학 경설」 등의 다카하시 논문과 서평이 실려있다.
「조선 유학의 학술사는 매우 간단하고, 단조롭다. …조선유학사의 가치는 학설보다도 오히려 사회 정치적으로 국가 사회에 미치는 세력의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인심을 지배하는 힘에서 그것은 위대하다. 그것은 정당과 학파를 결합한 경우에 가장 눈에 띄었다. …조선이 어떻게 여러 학파 가운데 가장 온건 중정한 주자학이라는 단일 사상으로 만족했는지 궁금하다. 조선인은 여기에서도 그 국민성의 특색을 유력하게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조선 유학 대관」 가운데)
조선의 많은 정쟁들이 이런 철학 유파와 전혀 무관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카하시는 조선의 학술사가 단조롭다느니, 국민성을 보여준다느니 하면서 조선의 사상을 심하게 폄하하고 있다.
노예의 마음에 주인을 존경하고 스스로에 대한 비하를 정당하게 여기는 철학을 새기려는 생각을 그는 학문의 바탕에 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옮긴 조남호씨는 『다카하시는 식민지 관료로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글을 쓰긴 했지만 그가 제기하는 철학적인 문제는 아직도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있다』며 『그를 극복하는 일을 한국철학계는 21세기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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