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베트남 호치민시에서는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 관중을 동원한 한·베트남 합동 연예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한국의 탤런트 장동건씨였으며, 행사장에 운집한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이 장씨가 출연한 TV드라마 「의가형제」의 단골 시청자들이었다. 우리말의 베트남어 더빙이 약간 어색하긴 해도 대발이네 일가가 등장하는 「사랑이 뭐길래」도 이곳에서 국내 방영 때 못지 않게 높은 인기를 누렸다.베트남인들은 벌써부터 그들의 정서와 딱 맞아 떨어지는 한국의 홈드라마에 매료되어 있다. 그래서 드라마 방영과 함께, 한국산 화장품이 베트남 시장을 선점한 피에르가르뎅의 매출을 추월했다는 즐거운 비명도 들린다. 베트남 현지에 진출한 한국의 중소 기업인들은 업무차 귀국했다가 되돌아갈 때는 반드시 현지 고용인들을 위한 선물로 우리 TV탤런트들의 대형 사진을 수백장씩 사가고 있다.
베트남 사례와는 차이가 있지만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 한국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에서 공수되는 비디오를 통해서 교민들이 즐겨 보는 드라마가 중요한 매체역할을 하고 있다. 약간 다른 케이스이긴 하지만, 이미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여 콧대가 높아지고, 특히 한국인에 대해서 텃세가 심한 싱가포르의 국영 TV TCS(채널 5)가 현재 주중 최고의 황금시간대인 일요일 밤 8시 30분에 방영하는 인기 홈드라마 「The Ride Home」에 최진완(Choy Jin Wann)이라는 약관 20세의 한국인 유학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위와 같은 한국열풍은 이제까지 동남아에서 정치와 경제면 이외에는 다소 미진했던 문화분야에서의 한국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공감대의 확충은 비록 시간·공간적으로 지루한 투자가 뒤따라야 하지만, 한국과 동남아라는 서로 다른 문화권과 양쪽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동남아는 한국과의 지리적 인접성,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동남아의 자원, 시장성, 노동력과 잘 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90년대 후반 이후 국제사회에서의 정치·외교·안보면에서의 지위 향상 등으로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최근 아세안과 한·중·일의 동아시아 협력체가 정례화함으로서 한국과 동남아 간의 협력구조가 확고한 기초를 다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세안으로 틀을 같이 하고 있는 인구 5억명의 동남아 10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피할 수 없는 중국에 대한 부담감을 지고 있으며, 70년대 중반 이래로는 일본경제에 예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심화현상을 또한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동남아국가들은 한국과의 관계증진을 통하여 이들 두 동북아 강대국으로부터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대 동남아 호혜적 협력관계를 장기적으로 심화발전시키기 위하여 양측의 문화적 공감대를 넓히고, 해당분야의 다양화와 저변확대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한·아세안 간의 학술교류 등 인적교류와 문화협력을 강화하고, 동남아 각국의 한국학 연구열기가 식지 않도록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기회에 정부의 관계부처도 일본의 사례를 깊이 관찰하여 동남아 협력분야의 기능과 역할을 대폭 강화하고, 이를 통하여 대 동남아 협력사업을 효과적으로 지원함으로서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대비하여야 한다.
양승윤 /한국외국어대 교수·동남아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