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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괴개굴 폭격에 수백명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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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괴개굴 폭격에 수백명 숨졌다"

입력
1999.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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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피란민 행렬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미AP통신의 보도가 전해지자 29일 경기 김포와 용인, 충북 단양 등 전국 각지에서 피해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이들은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피란민이었다며 정부의 진상조사를 촉구했다.○…51년 1월20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괴개굴에 대한 미군기의 폭격으로 아버지와 형 등 일가족 4명을 잃은 조병달(63)씨는 『괴개굴 폭격으로 상2리 주민뿐 아니라 타지에서 피란민 등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며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 간병 때문에 괴개굴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상2리 주민 조태원(趙泰元·76)씨는 『당시 미군이 육로를 이용해 피란하려던 사람들을 못가게 해 300여명의 피란민이 동굴로 이불 등을 준비해 들어갔다』며 『비행기 4대가 공중에서 동굴에 집중사격을 했으며 소이탄까지 쏘아 연기가 굴 안에 가득찼으며 대부분이 질식해 숨졌다』고 회고했다.

또다른 생존자 조일원(83)씨는 『당시 괴개굴에 피신했던 주민 대다수가 숨졌다』며 『상2리에서는 해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음력 12월12일)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51년 1·4후퇴 당시 고향인 경기 김포에서 경기 둔포로 피란을 갔던 김인태(金寅泰·58·샬롬호스피스선교회 목사)씨는 미군의 공습으로 피란민 300여명이 숨졌다고 증언했다.

당시 10살이었던 김씨는 아버지,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1월 중순께 김포에서 사흘을 걸어 고향 면사무소옆 넓은 적산가옥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밤에 미군의 공습으로 아버지와 두 동생을 잃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현관에서 잠을 자다 아우성 소리에 깨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보니 떨어진 귀와 살점 등이 잡혔다』면서 『10여리를 기어 백사포까지 도망쳤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두환 노태우 정부 당시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고 현 정부도 미온적이기는 마찬가지』라면서 『피란민들이 희생된 현장에 위령탑이나 기념 교회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51년 1월12일 경기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에서 미군기의 폭격을 받은 홍원기(洪元基·62)씨는 『당시 오산쪽으로 피란을 가던 중 오전 9시께 미군기 F-80의 습격을 받았다』며 『우리를 중공군으로 오인한 것이라 생각해 손을 흔들어 피란민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폭격으로 홍씨는 부모님, 누나 옥기(당시15세)씨, 외할머니 등 모두 6명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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