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월드워치] 세기말의 성전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월드워치] 세기말의 성전

입력
1999.12.29 00:00
0 0

인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것 2가지는 세금과 죽음이라고 서양사람들은 말한다. 공감이 가는 얘기다.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한국남자들은 여기에 병역을 추가해야 한다. 솔직히 세금, 죽음, 병역을 반기는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들다.교도소에 가는 것만큼이나 군대가는 것을 싫어하는 젊은이들의 성향이 대규모 병역비리로 불거져 올 한 해를 시끄럽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군복무 기피경향은 미국사회도 마찬가지다. 빌 클린턴대통령이 대선때 병역미필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과정에서 이미 목격한 일이다.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가였던 말콤 X가 2차대전때와 한국전 당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잔꾀를 부린 일화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1943년 뉴욕 징병검사소에 출두한 말콤X는 정신병자로 가장해 불합격 판정을 끌어낸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부터 『말콤X가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고 싶다며 떠들고 다닌다.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문을 주위에 퍼뜨렸다.

신체검사장에 가서도 정신과의사에게 『남부에 내려가 흑인 무장군을 조직해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횡설수설하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등 기행(奇行)을 거듭한 끝에 징병관들로부터 징집면제 판정을 받아낸다.

말콤X는 한국전 때도 징집에 응하지 않고 공장에 다니다가 미연방수사국(FBI)의 불심검문에 걸려 또 다시 강제징집을 당할 위기를 맞았다. 이 때도 그는 회교도임을 내세워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양심적인 입영거부라는 판정을 받고 빠져나왔다.

이 이야기는 「뿌리」의 저자인 알렉스 헤일리가 쓴 말콤 X자서전에 나와 있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이야기지만 천태만상의 꼼수와 비리를 동원해 병역을 기피해 보려는 우리 사회의 현상황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미국은 지금 지원제를 채택하고 있어 말콤X가 두려워했던 「엉클샘 카드(미국 징집영장)」는 없어졌다.

요즘 미국군대는 복무중 대학교육비 지원, 사회보장, 아주 저렴한 출산비 보조등 각종 혜택을 누리고 싶어 하는 자원자로 구성돼 있다. 대개 3년을 근무하고 연장복무도 가능하지만 제대자에 대한 가산점제도는 없다.

독일의 경우는 의무병제를 택하고 있다. 주한 독일대사관 무관실에 물어 보니 독일청년의 경우 누구나 10개월의 병역의무를 마쳐야 한다. 하지만 제대군인에 대한 특혜는 전혀 없다고 한다. 신체적 결함이 있어 징집에서 해제되는 사람,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남자는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 근무등으로 병역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근무기간이 2~4개월 연장된다고 한다. 선진국의 경우 제대군인을 위한 가산점제도는 없는 셈이다.

군필자 가산점부여에 대한 헌재(憲裁)의 위헌결정을 둘러싸고 느닷없이 성(性)의 전쟁이 한창이다. 나도 군대3년을 꽉 채우고 제대했지만 개인적으로 헌재의 결정에 동의한다. 동시에 인생의 황금기를 국가를 위해 봉사한 사람들에게 국가차원의 보상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그같은 보상은 가산점제도처럼 여성에게 취업상의 불평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헌재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취업시험에서의 기회균등원칙을 거부할 명분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가산점문제는 굳이 남녀간의 제로섬 게임으로 볼 필요가 없다. 특히 우리의 안보현실을 감안할 때 입영 보이콧운동, 헌재나 이화여대 홈페이지 해킹하기, 게시판에 대고 욕설해대기와 같은 감정적인 대응에는 점수를 줄 수가 없다.

냉정하게 한 발짝씩 물러나 양측 모두에게 공정한 방안을 모색해 보자. 한 외국인은 모든 제대자에게 군생활을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엄청난 재원을 필요로 하는, 현실성이 결여된 듯한 발상이지만 보다 성숙한 토론을 통해 각계의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편집위원

behapp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