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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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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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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지나가고, 한 세기가 지나간다.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시간은 영속되는 것이지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자신을 두고 한 해가 지났다, 한 세기가 지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편리를 위해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고 첫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과 세월의 구분은 소중하다.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임영조의 시「12월」 전문)

12월말, 한 해를 보내는 벼랑에 서서 나도 나를 돌아본다. 「밥 적게 먹고 공부 많이 하라」는 선현의 말씀을 나는 실천하지 않았다. 연초에 일중일식(日中一食)은 못하더라도 일중이식(日中二食)은 하리라 그토록 다짐했건만, 그저 욕심 많게 밥 많이 먹는 일에 골몰하기만 했다. 아랍 지역에 가면 거대한 선인장들이 사막에 퍽퍽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사막에 한번 비가 오면 선인장들이 너무 물을 많이 들이켜 그만 자신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죽은 탓이다.

욕심 많은 나도 그 선인장처럼 밥을 많이 먹어 지금 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선인장은 자신의 시체를 새의 먹이감으로 내어놓지만 나는 누구의 먹이감도 되지 못한다. 부끄럽다. 1999년이라는 시간의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강가에 두고 가야 하는데도 나는 지금 뗏목을 어깨에 짊어지고 갈 차비를 차린다. 부끄럽다. 강가의 산바람이 내 가슴을 파고 든다. 춥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성탄절 날 비로소 예수의 손에는 십자가의 못자국이 나기 전에 먼저 목수일로 생긴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내 손을 들여다본다. 내 손엔 굳은살은 없고 주름살만 있어 더럽고 초라하다.

다행히 며칠 전 하늘은 나같은 인간을 위해 한바탕 함박눈을 내려주었다. 그날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새벽에 강남역 부근 대로 한가운데에 누가 커다란 눈사람을 한사람 세워놓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지나가면서 저 눈사람이 단 하루인들 눈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인간을 죽이는 저 수많은 자동차들이 눈사람 죽이기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한 해에 교통사고로 전주시 인구만한 사상자가 난다는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만일 화순 운주사 석불들이 서울에 와 산다면 다 차에 치여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눈사람은 죽지 않는단다. 꼬마야, 눈사람은 절대 죽지 않아』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저씨, 눈사람은 죽었어요.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이렇게 죽었잖아요』 (최승호의 시 「자동차에 치인 눈사람」 전문)

올해도 나에겐 왜 이렇게 외로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없고 「나」만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우리는 외롭게 홀로 울면서 태어나고, 중환자실에서 외롭게 홀로 죽어간다. 아무도 그 외로움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 외롭다고 말하는 이들의 외로움은 조금 사치스러운 외로움이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오는 외로움이다. 자기만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롭다. 그러나 20세기가 저무는 이때에 울지는 말자. 막다른 길로 몰린 산토끼는 어린아이처럼 운다고 한다. 어디선가 너와 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졸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전문)

새해에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나도 「광야에 선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예수회 송봉모 신부는 그의 저서 「광야에 선 인간」에서 광야란 자신의 바닥을 대면하는 빈 들이라고 말한다. 광야는 우리 마음 바닥 깊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우리 삶에 황폐함, 외로움, 목마름 등을 형성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보는 자리이며, 자신의 바닥을 대면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벌거벗는 일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광야는 있다. 광야는 우리들이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할 삶의 중간 과정이다. 그러나 적나라하게 자신을 벌거벗지 않고서는 자신의 광야를 보지 못한다. 나는 새해에 내 인생의 광야에서 훨훨 벌거벗고자 한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어 그동안 내가 어떠한 광야를 거쳐왔는지, 또 내가 어떠한 광야를 거쳐가야만 하는지 알고자 한다. 송신부는 「광야는 생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고 한다. 지금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우선 순위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광야에서 나는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인가.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시 「광야」 전문)

21세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광야다.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아왔던 우리에게 이제 기술친화적이고 정보친화적이고 우주친화적인 삶의 광야가 가로놓여 있다. 이제는 기계와 기술과 정보가 우리 삶의 본질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별에 신혼여행을 갔다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낙엽이 지지 않고 꽃이 피어나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가슴 속엔 서정의 물기가 메말라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래 살아 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이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정현종의 시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전문)

내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기만이다. 내가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다. 내가 가슴 속에 적을 남기지 않고 죽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란다. 아무도 증오하지 않고 살게 되기를 기도한다. 내 가슴 속에 적을 남기지 않고 죽게 되기를 바란다. 2000년 새해에는, 그리고 21세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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