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가장 극적인 장면중 하나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국제무대 등장이다. 소련의 해체는 동서냉전의 종식과 「팍스 아메리카나」시대의 도래라는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이 남긴 거대한 대륙의 혼돈과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은 국제사회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기감과 동시에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시장경제 실험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90년대는 과도기적인 혼란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교차된 시기였다. 러시아는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에 따른 후유증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여러 차례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99년 들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줄어들었다. 특히 내년 6월 대선을 앞두고 지난 19일 실시된 러시아 총선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러시아 정국의 예측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의석분포상으로는 공산당(111석)이 여전히 제1당을 고수했지만, 통일당(76석)과 우파연합(29석), 조국·전러시아당(62석) 등 중도파 정당들이 약진, 정국불안요인을 크게 감소시켰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후계자로 낙점한 블라디미르 푸틴(47)총리의 인기가 총선 전후 급부상한 점도 러시아의 정치안정에 도움이 될 전망이다. 서방전문가들은 『지난 8월 총리직에 오른 푸틴의 지지율 상승은 불투명했던 향후 러시아의 정국전망을 밝게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긍정적 변화의 흐름이 나타났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99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마이너스 3%로 떨어지는 등 암울한 전망이 주류를 이뤘으나 중반을 넘어서면서 바뀌었다. 올해 말이나 내년초에는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기대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우 러시아가 내년 중 2.0% 성장을 전망했다. 국제유가의 상승도 러시아의 경제회복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푸틴 총리는 27일 이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대외결제시스템의 확고한 유지 등 올해 약속한 각종 재정 의무를 완전히 이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IMF 구제금융 6억4,000만달러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자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더라도 러시아의 재정운용에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 지표상의 긍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장래는 여전히 예단키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경제다. 98년말 현재 외채가 1,480억달러에 이르고, 내년에 만기도래하는 외채만도 100억달러에 이른다. 채권국과의 채무재조정 협상에 문제가 생길 경우 한순간에 위기를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현재의 경제회복이 구조조정 통한 과감한 체질개선작업없이 이뤄졌다는 부분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체첸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서방, 특히 미국의 대 러시아 정책이 점차 강경기조로 바뀌고 있어 러시아로선 선택범위가 넓지 못한 것 같다. 군부변수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려되는 점은 러시아의 국민 정서다. 이코노미스트 최근호(12월18~30일자)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 대다수(응답자의 63%)는 아직도 현 상황을「난세」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선호도(35%)보다는 공산주의 선호도(48%)가 더 높게 나타난 것도 러시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현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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