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존재에 대한 1차적 담론은 시가 제공할 것」(노혜경)이라는 전망은 얼마나 적실할까. 혹 이것은 「담론은 현실을 늘 앞서간다」는 원리에 따라 성급하게 앞당긴 시적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하이데거처럼 존재망각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현대의 특성을 「사유로부터의 도피」로 파악한다면, 세기말의, 이유없이 벅찬 음울 속에서 내다보는 인류의 장래는 썩 밝아 보이지 않는다. 거품이 거품을 낳는 평박(萍泊)의 시대에, 노혜경의 희망처럼 시는 다시 「존재와의 연관성」(야스퍼스)을 회복시키는 기연(機緣)이 될 수 있을까.시인 권경인은 내게 하나의 경이로움이었다. 그녀의 시편들은 어떤 철학자들보다 섬세하고 알뜰하게 「존재」의 결(理脈)을 내 눈 앞에 띄워 놓았다. 겉은 지극한 서정성의 채색을 갖추었지만, 그 시들은 늘 빈 생각의 너머에 존재를 피워올린다.
「아무 생각도 없는데 목책 너머엔/ 벌써 꽃이 피고 있다/ 밤길에 그림자 고이듯/ 보이지 않는 그대의 길을 따라/ 오늘은 내가 간다」(「등산」 중 일부).
혹은 관념으로 존재를 호출하려 했던 이론가들의 허점을 아름답고 매섭게 파고들며, 조롱하듯 미소지으면서 숨어버린다. 노혜경의 기대와는 또 다른 뜻에서 권경인은 「21세기, 존재에 대한 1차적 담론은 시가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선취한다.
몇 차례 밝힌대로 나는 적지 않은 분량의 습작을 업보처럼 업고 다니는 실패한 시인이었다. 산문에 명운을 걸기로 작심한 뒤 시를 감춰둔 채 후회없이 걸어왔으나, 수상한 것들이 시인의 명패를 붙이고 갖은 잡담을 늘어놓으며 대중과 수작을 벌일 때마다 나는 그 후회없었음을 슬며시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권경인의 시들은 시를 접고 산문의 길로 들어서면서 다진 내 마음의 초발심을 다시 뜨겁게 일깨운다. 시는 우리의 시인들에게 맡긴 채 나는 안심하고 내 길로 걸어가자는 그 속다짐을 다시 쟁여보는 것이다. 권경인과 내가 함께 뚫어내고자 하는 길에서야 필경 시와 산문이 다를 리 없으니.
「얼마나 더 헤매어야/ 헛된 것들에게서 비로소 자유로울까/ 황량할수록 더욱 초롱한 샘물 하나 숨기고 있을/ 눈부신 외길/ 사막의 길」(「빈길」 중 일부).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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