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천년의 마지막 해인 99년, 반상의 세계에선 어떤 세기말의 징후도 감지되지 않았다. 「돌부처」 이창호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불패(不敗) 신화」를 이어갔고 불세출의 명장(名將)들이 포진한 한국바둑은 세계무대에서 여전히 최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종전의 역학구도가 한층 공고해진 가운데 국내 2인자 그룹에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 정도.■「돌부처」의 불패신화
6월말 제1회 중국 춘란배 결승전에서 스승 조훈현9단에 1대2로 분패, 우승을 뺏긴 뒤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창호9단에게 「예외」란 없었다. 9월 27일부터 10월18일까지 타이틀 방어전을 포함해 파죽의 11연승을 올리는 등 정상 컨디션을 단숨에 회복, 「부동의 1인자」임을 분명히했다. 상금액수도 2위와 5억원가량이나 차이나는 8억원대. 전체 승률(83.33%)은 「반상의 마녀」루이나이웨이9단에 이어 2위. 주로 타이틀전 결승전과 국제기전 본선무대에서 최정상급 기사들을 상대로 올린 전적임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1위의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국제무대에선 제4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선수권대회와 제3회 LG배세계기왕전 등 2개 대회 우승. 특히 삼성화재배에선 일본 혼인보(本因坊) 타이틀 보유자인 조선진9단을 제물로 세계 바둑사상 최초로 국제대회 3연패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9단의 선전에 힘입어 한국은 제1회 중국 춘란배(조훈현 9단 우승), 제12회 후지쓰(富士通)배(유창혁9단 〃)등 올들어 개최된 4대 국제기전을 싹쓸이, 세계바둑을 사실상 천하통일했다.
■ 노장들의 부활
바둑기자단이 수여하는 올해 바둑문화상 수훈상(최우수기사상은 이창호9단)에 조훈현·서봉수9단이 공동수상자로 선정됐다. 둘 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젊은 시절 못지 않은 투혼과 뚝심으로 재기에 성공, 신예기사들에게 귀감이 됐기 때문이다. 특히 「야생마」 서봉수9단은 올 가을 「세계 최고의 공격수」유창혁9단을 꺾고 제4기 LG정유배(구 테크론배)를 거머쥐면서 7년 무관(無冠)에서 탈출, 돌풍의 주역이 됐다. 서9단이 타이틀보유자 대열에 진입함으로써 국내 기계 영토분포는 이창호 5(명인·왕위·기성·천원·최고위), 조훈현 3(국수·패왕·KBS바둑왕), 유창혁 1(배달왕), 서봉수 1(LG정유배)로 재편됐다. 이·조·유 3강에 「차세대 선두주자」 최명훈7단 정도를 포함시켰던 「4인방 체제」가 서9단의 기적같은 부활로 최7단을 제외한 「신 4인방 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조9단 역시 종합전적 42승13패를 기록, 76.36%로 최근 5년만에 최고의 승률을 기록한 한 해였다. 최대의 난적 이창호와 모두 6번 싸워 4승 2패의 단연 우위를 지키는 등 「사제(師弟)대결 컴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특기할만하다.
■ 덤6집반 시대 본격화
「선착(先着)의 효(效)」를 상쇄하기 위한 흑집 공제제도가 올해를 기점으로 5집반에서 6집반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주목된다. 국제대회에서는 LG배세계기왕전에 이어 삼성화재배와 농심신라면배가 잇따라 6집반제도를 채택했으며 국내 전통기전으로는 처음으로 SK엔크린배 명인전이 올해 개막한 제31기 대회부터 덤을 6집반으로 바꾸었다. 보수적인 국내기전에까지 이 제도가 공식 채택됐다는 점에서 앞으로 적지않은 파급효과가 예상된다.
이밖에 국가별 단체대항전인 제1회 농심배신라면배(옛 진로배)와 제1회 흥창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옛 보해배) 등 국제통화기금(IMF)의 여파로 폐지되었던 기전들이 잇따라 부활한 것이나, 신예강자 안조영5단과 목진석4단이 도전무대에 첫 등장한 것, 올 4월 남편 장주주9단과 함께 한국에 정착한 루이나이웨이9단이 첫해부터 승률 1위의 대활약을 하고 있는 것 등도 올해의 주목할만한 사건들이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