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의 화두는 「검찰」이었다. 대전지검 법조비리, 대구고검장 항명, 소장검사들 연판장, 옷로비의혹, 대검공안부장 파업 발언, 특별검사 수사, 전직 검찰총장과 청와대법무비서관 구속…. 정치 중립도 선언했지만 「업보의 늪」은 깊었다. 스스로 일어서야 하고, 힘껏 일으켜야 한다.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짚어본다.『국가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검사들이 오히려 국가를 흔들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검찰 스스로의 반성이다.
대전법조비리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변호사들로부터 검사들이 관행적으로 향응을 받아 온 치부가 드러났고, 항명파동으로 조직이 흔들렸다. 급기야 옷로비 의혹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으로 국민들은 「보통 검찰」 대신 특별검사를 선택했다. 해를 마감하면서도 검찰은 봐주기 수사의혹까지 받고 있다. 도덕성과 중립성, 공정성과 독립성이 한꺼번에 땅에 떨어졌다.
위기의 검찰, 그 구조적 원인은 통치권력과 검찰이 긴장관계에 있지 않고 종속관계가 있다는게 주 원인이다. 서울대 한인섭교수는 『정치권은 검찰조직과 검찰권을 정권유지의 가장 합법적인 수단으로 이용해 왔고, 검찰은 스스로 「정치 검찰」로 전락했다』고 진단했다. 통치권자는 검찰의 인사권을 쥐고 있어 중립성에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간섭을 견제하고, 중립을 보장하는 장치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수를 편의에 따라 교체했고, 청와대에 파견된 검사들을 통해 검찰권 행사에 개입하는 악습은 여전하다.
검찰 스스로도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경실련 고계현 정책실장은 『검찰의 강한 정치성향과 집단이기주의가 정치권의 간섭을 초래했다』며 『정치권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란처럼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다음 자리」를 위해 수뇌부는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검사는 줄을 대려고 안간힘을 쓰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당한 지시에 「노(NO)」라고 말하는 검사는 없고, 설령 생각이 달라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만 있다. 내부에서조차 학연, 지연, 근무연으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패거리 문화에 대한 우려도 높다. 서울지검 한 간부는 『모 검찰총장이 퇴임 후 바로 여당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검찰이 정치에 강간 당한 대표적인 사례』라며 수뇌부들의 부족한 소명의식을 꼬집기도 했다.
정치문제를 정치권이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사사건건 고소·고발로 처리하려는 정치권의 행태가 국민들이 검찰을 믿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정쟁을 거치며 온갖 억측과 루머로 오염된 사안에 대해 아무리 법논리가 정당해도 국민들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국대 장석권총장은 『일본 검찰이 자본주의의 파수꾼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깊은 애정과 신뢰 때문이었다』며 『정치권의 반성은 물론, 국민들도 검찰이 스스로 자정기능을 회복하도록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정덕상기자
jfurn@hk.co.kr
■[월요포커스] 형사부 말석검사의 '애환과 희망 일기'
『야, 뉴밀레니엄 전에는 옷로비 사건이 끝나는 거야』
지난 22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식당. 대학동기 모임에 참석한 서울지검 K검사(32)는 화제가 올 초부터 터지기 시작한 대전법조비리부터 옷로비의혹 사건 등 검찰 수난사로 번지자 『괜히 왔나보다』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친구들이 마침내 『박주선 전비서관 구속을 놓고 검사들끼리 싸웠다며…』라고 농담처럼 말을 꺼내는 순간 K검사의 뇌리에는 올 한해 검찰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사시 34회로 지난 95년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K검사는 3년동안 법무관으로 근무한 뒤 지난해 3월 서울지검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 때만 해도 그는 동료검사들이 선망하는 서울지검 본청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1년9개월이 지난 지금 그 자긍심은 노루꼬리만해졌다.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쌓인 사건에 치여 몸은 파김치가 된 데다 몇몇 사건들로 검찰에 대한 신뢰가 땅끝까지 추락해 자괴감만 늘었기 때문이다.
K검사가 한달에 처리하는 사건 수는 대략 300여건. 이중 250건은 폭력 사기 등 경찰에서 송치된 사건이고, 나머지는 기소중지 사건과 고소·고발사건들이다. 일주일에 두번 사건을 배당받는데 한차례당 30~40여건이 쏟아진다. 하루에 평균 10여건을 처리하는 셈. 그러나 사건중에는 법률적용 등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다, 3개월내에 한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면 「장기미제」로 분류돼 인사평점에 반영되는 만큼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불밝히는 날이 습관처럼 몸에 뱄다. 요즘은 시간이 아까워 아예 저녁을 거를때가 많다. 사건을 마무리짓는 월말에는 토요일 저녁까지 사건을 처리하다 기록을 싸들고 집으로 갖고 간다. 또 부서내 기획업무까지 떠맡아 공문발송 등 잔무를 처리하다보면 일요일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사무실에 나와야 된다. 검사로서 한번 해보고 싶은 「인지(認知)수사」는 이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분당에 사는 부인(28)과 아들(3) 얼굴 보는 날이 일주일에 손꼽을 정도다. 신혼초 검사 남편을 둔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부인의 낯빛도 요즘에는 납덩어리처럼 굳었다. 『애하고 놀아주지도 못하는데다 경제 사정도 넉넉치 않은 탓인지 불만이 많아요』 K검사 부인은 지난해까지 외국회사 홍보팀에서 근무하다 올해부터 영어강사로 근무중이다. K검사의 실제 연간소득이 2,500만원밖에 되지않아 살림꾸리기가 빠듯해 부인까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것이다. K검사 부부같은 맞벌이 부부는 검찰내에서 이제 한 두쌍이 아니다.
K검사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검찰 위상이 추락해 피의자 등 조사자들에게 권위가 서지 않을 때다. 『피의자가 오히려 삿대질을 하며 욕설과 고성을 지를 때가 많아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죠』
하지만 그는 검찰의 위기가 언제까지 계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 검찰조직이 숱하게 두들겨 맞았다는 이유로 검사직을 그만두겠다는 동료들은 없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사회가 바로 선다는 자부심을 아직 잃지 않고 있는 것이죠. 또 우리 「회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조직으로 거듭 나려면 뭣보다 검찰 생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게 K검사의 생각이다. 어느 조직이라도 아래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위의 눈치만 본다면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게 그의 믿음이다. 법원의 「평판사 협의회」같은 기구가 검찰에도 만들어져 「하의상달」이 제대로 이뤄지면 소장검사들의 항명파동은 물론, 정치적인 압력과 외풍에 휘둘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새 천년에는 그의 희망이 현실로 다가오기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월요포커스/기고] 혁명적 전환만이 살길
올 한해 검찰은 오랫동안 누적되어 왔던 구조적인 문제들이 한꺼번에 곪아 터지면서 결국 스스로 폭발 직전까지 추락했다. 국민들은 검찰을 극도로 불신하게 되었고 검찰에 대하여 동정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검찰은 스스로의 업보 때문에 사면초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검찰이 이처럼 된 원인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이젠 그야말로 탈바꿈하여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말로만 그럴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방법으로 모든 제도와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검찰은 이제 다른 국가기관이나 국민을 걱정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위상을 되찾는 노력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첫째, 검찰은 다른 잡다한 일은 접어두고 특별수사력을 강화하는데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와 불법 무질서를 바로 잡기위한 노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공연히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검찰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듯한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둘째,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위해 검찰총장을 비롯해서 전 간부가 비장한 선언을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수사와 관련하여 정치권으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이나 청탁도 배격하여야 한다. 만일 이런 압력이나 청탁이 있으면 이를 그대로 공개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악습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셋째, 중요한 사건 수사과정을 투명하게 국민들에게 알려가면서 수사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검찰은 편의적인 사고로 사건 내용을 알리기도 하고 알리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 특별검사 수사에 있어서 국민적 지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앞으로 국민적 관심을 갖는 사건에 대하여는 수사상황을 정확하게 공개함으로써 공연한 오해나 불신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넷째, 검찰인사가 공정해야 한다. 군대식 서열개념에 따라 일률적으로 정기인사를 지나치게 자주하는 것은 검찰의 힘을 약화시키게 된다. 정권교체에 따라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현재의 검찰인사는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또 한 곳에 오래 근무하게 함으로써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들어야 한다.
다섯째, 검사의 권한이나 위상을 약화시키는 제도를 과감하게 개선하여야 한다. 3개월 미제사건의 통계나 무죄평정 또는 항고제도 평정 같은 제도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선하여야 한다. 사건수사는 일반 행정업무와는 전혀 성질을 달리 한다. 따라서 행정기관의 업무평가와 같은 기준으로 검사의 업무를 평가하고 통제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지금까지 검찰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방안은 수십가지가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되어 국민앞에 선보였으나 모두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검찰은 이제 더 이상 말로만 개혁할 것이 아니고 진정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00년 한해는 그런 의미에서 검찰이 새로 태어날 수 있느냐 하는 중대한 전환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김주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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