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도 힘든 해였다. 몇년전만해도 갓 채용된 교수들이 강화된 재임용제도에 맞추느라 정신없이 허둥대는 것을 보면서 『아, 참 나는 운도 좋구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정교수가 됐으니』라고 좋아했는데 어느새 나도 온통 그들의 허둥댐과 불안에 감염돼 있다.『일제시대 나라없는 서러움 가운데서도, 해방후 그 혼란한 정국에서도, 군사독재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어딘지 신이 나는 데가 있었는데 요즘은 왜 이렇게 앞이 캄캄하냐』는 팔순 아버지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고 『선생님 말은 알아듣겠는데요, 몸이 말을 안들어요』라는 학생의 말을 피부로 느끼게 되면서 내 안에서 고통의 계절은 시작됐던 것같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절이 오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힘들고, 고통의 끝이 잘 보이지 않기에 더욱 힘들다. 지금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바보이거나 사기꾼이라는 친구의 말에 위로를 받으면서도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다. 상상 불가능한 세상으로 치달아가는 인류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고 누구라도 그 살인적 속도를 피해갈 수 있을까.
전환의 시대라 한다. 전 인류를 거대한 공장체제로 끌어들인 20세기는 바야흐로 퇴장하고 있다. 20세기가 낳은 천재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스」라는 영화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었듯이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거대한 컨베이어벨트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대량생산을 위한 기계적 시계에 맞추어가기 시작했다. 훈육과 제복의 시대는 시작됐고 유토피아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자신의 몸을 기계에 길들여갔다.
다행히 인류는 컨베이어벨트 속에서 일할 인공지능체제를 만들어냈다 한다. 이제 인류의 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컨베이어벨트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체제와 창의적인 인간이라고 한다. 새로운 생산양식을 만들어내고 규정들을 바꿔야 하는 때라는 것이다.
그런세 아직 많은 사람들이 기존 규정집을 경전처럼 받들면서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는 이들을 「왕따」시키고 있다. 대량생산체제에 길들여진 속도와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변화는 분명 오고있다. 「기계시간」에 맞추다가 허망하게 과로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미 「똑똑한」 이들은 「체제탈출」을 꾀하고 있다.
컨베이어벨트 외곽에서 아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면서 유기체적인 몸을 보존하겠다는 사람들이다. 혼미한 중세말기에 선각자들이 선택한 것이 「머리」였다면 후기 근대의 선각자는 그래서 「몸」을 선택한다.
이번 연말에 나도 「선각자」가 될 다짐을 해본다. 그래서 2000년부터느 생산성없는 컨베이어벨트와는 무관하게 살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속도를 늦추기 위해 태업을 할 것이다. 태업을 하면서 비축한 에너지로 대량생산체제가 금지한 것들을 열심히 할 것이다. 몸의 소리를 듣기, 일상에서 함께 나누는 이들과 깊이 눈을 맞추고 서로 느끼기, 길이 아닌 길을 탐험하며 천천히 산보하기, 남에게 내 페이스를 강요하지 말기….
실은 100년전에 폴 라파르그(1842~1911)라는 통찰력있는 지구인이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가만히 멈춰서서/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그저 근육과 감각을 움직일 시간이 필요하다/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내가 살고싶은 세상을 구상하고/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조한혜정·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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