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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싶은 것들을 우리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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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싶은 것들을 우리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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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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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있어 헛헛하지 않다. 풍성한 한 해(한국영화 시장점유율 40%)였지만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는 한국 영화. 노래와 분위기에 너무 취한 것은 아닐까. 이창동(45)감독은 그 잔치의 주인공이 아니다. 잔치가 끝나고 어둠이 찾아올 때, 현실의 시간으로 돌아설 때, 이 이야기꾼은 『우리 얘기 좀 해보자』고 조용히 입을 연다.그가 소설을 떠나 영화에서 하는 얘기는 공허하지 않다. 행복하지도 않다. 어쩌면 우리가 『모른척 했으면』하는 것들, 아니면 생채기가 덧날까 머리를 흔들며 잊고 싶어하는 것들을 그는 이야기 주머니에서 하나씩 풀어낸다. 과장도 없다. 요란한 몸짓도 않는다. 환상도 없다. 이야기꾼은 상상이 아닌 일상에서, 저잣거리에서, 이웃사람에게서,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이야기를 줍는다. 그리고 베를 짜듯 능숙하고 치밀하게, 그러면서 상투적이지 않게 베틀 위에 올려 놓는다. 그가 짠 이야기의 천은 팬시상품과 할리우드 모방으로 벌거벗은 한국영화를 감싸는 속옷이 된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영화인들도 있다. 이제 겨우 두 편. 아직도 신인인데. 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설가였는데(83년에 등단, 92년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이 정도만 돼도 난리를 치는 한국 영화계가 서글프다』는 한탄도 나온다. 그러나 그 반응에 그는 우쭐해 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옷는다.

『소설을 쓰기 전에도, 소설을 쓸 때도, 영화를 하면서도 나는 이야기꾼이다. 매체가 달라지고 표현양식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있다. 저 신화에서 지금의 영화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배우고 현실을 인식한다』

소설에서 영화로 이야기 터를 옮긴 이유는 「일상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말의 관념성은 힘을 잃는다. 그래서 소설은 이야기를 잃어 버렸고, 이야기를 잃어버린 소설은 위기를 맞았다. 일상을 보여주는 데는 영화가 편하다. 일상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그 진실이나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일 자체가 무모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 꾼의

숙명이다. 아직도 우리 삶의 구조는 이야기가 해체된 후기산업사회의 유럽과 달리 역동적이고 고통이 내재된, 어딘가로 가고 있기에 그는 일상(현실)의 이야기꾼을 자처한다.

이창동 감독은 『내 이야기의 모든 출발점은 인간』이라고 했다. 인간을 어떻게 보고,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얼마만큼 덜 왜곡시킬까. 데뷔작 「초록 물고기」(97년)가 바로 그 인간(한국인)의 삶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면 두번째 작품 「박하사탕」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2000년 1월 1일. 새로운 천년의 출발점에서 왜 그는 주인공 영호(설경구)를 통해 20년을 거슬러 가는 시간여행을 할까.

_「박하사탕」이 2000년 1월 1일 0시에 개봉하는 의미는.

『모든 과거는 지나간 미래다. 한 젊은이가 최초로 삶을 바라보던 자리로 가보자는 것이다. 그 꿈과 희망의 자리를 지나 온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지금 스무살에게는 현재이자 출발점이다』

_왜 순차적인 구성을 버리고 기차가 거꾸로 달리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나.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부터 생각했다. 인간의 사고와 욕망의 순서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가는 것이 맞다. 이런 구성은 외국영화에도 있다』

_영화를 보면 정말 지난 20년 우리는 미친 시대를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지난 20년 상황과 현실이 한 개인을 내버려두지 않는, 폭력과 독재로부터 떨어져 있어도 그것이 일상화한 환경에서 살았다. 그것이 삶의 상처와 어긋남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영호처럼 그 폭력에 편입하는 것이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흘러간 것이라면 그 「함몰」이 너무 슬프다』

_그래서 「박하사탕」은 끔찍하고 고통스럽나.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광주사태 때 진압군으로 가 여학생을 죽인 기억 때문에 영호가 첫사랑인 순임(문소리)과 헤어지는 장면이 가장 잔인하다고 했다. 그러나 젊은 관객들은 다르다. 우리가 4·19 얘기를 듣듯 거리를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앞으로 20년을 열심히 살겠다」고 말한다』

_「초록물고기」의 거리두기와 달리 감독의 감정이 배어있는 것 같은데.

『몇몇 장면은 굉장히 아프고 짓눌려 괴로워했다. 고문장면 촬영 전날밤은 나도 새디스트가 돼야 한다는 것 때문에 악몽에 시달렸다. 감독의 감정도 중요하다. 영화를 하게 된 동기도 자꾸 감정이 죽어버린 느낌 때문이었다』

_신인급 배우들의 열연이 인상적이다. 특히 설경구가 아니면 누구도 영호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성근씨는 연기자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20년, 그것도 차근차근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흔치 않다. 그래서 차라리 공격적으로 신인들을 썼다. 촬영을 하면서 배우 누구란 호칭을 쓰지 않는다. 영호, 순임으로 부르고, 배우들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배우로 보이는 스타들이 불만이었다』

순제작비는 11억원. 「박하사탕」 촬영을 시작하며 이창동 감독은 투자자인 유니코리아에 『5억원 이내의 적자를 본다고 생각하십시요. 그것이 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그러면서 『자고로 사탕 팔아서 떼돈 번 사람 없고, 사탕 팔아서 크게 망한 사람 없다』는 농담을 했다. 진짜 이야기꾼은 오직 어떻게 이야기를 잘 들려주었는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영호의 20년

(1)99년 봄. 기찻길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며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마주서는 영호. 그의 20년은 곧 미친 세상을 살아 온 우리들의 20년이다.

(2)87년 봄. 닳고 닳은 형사가 된 영호. 삶도, 아내와의 사랑도 권태로운 그는 순임이 산다는 군산 어느 카페 여종업원과 자면서 첫사랑을 생각한다.

(3)84년 봄. 신참형사 영호.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기억하며 자신도 그 폭력의 광기에 사로잡혀 한 근로자를 고문한다.

(4)80년 5월. 광주진압군으로 투입된 신병 영호. 어둠 속에서 다리에 총을 맞고 한 여학생을 실수로 죽인다.

(5)79년 가을. 구로공단 야학생인 영호와 순임이 소풍을 나왔다. 순임이 건네준 박하사탕. 영호는 아름다운 시간을 담는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한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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