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용택(千容宅)국정원장의 전격 교체는 국가정보기관의 장(長)으로서 부적절한 언행을 한 데 대한 문책을 의미한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천원장의 사의를 수락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천원장에게 책임을 묻고 다른 고위공직자들에 대해 경계(警戒)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묵은 멍에들을 털어버리고 분위기를 일신, 새해와 총선에 대비하겠다는 김대통령의 전략적 고려도 담겨 있다. 김태정(金泰政)전법무장관에 이어 박주선(朴柱宣)전청와대 법무비서관이 구속되고, 공동 여당의 합당까지 무산되면서, 김대통령으로서는 곪은 상처들을 도려내고 심기일전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국정원장이 대통령의 정치개혁 의지를 설명한다는 명분에서 대선자금을 예로 들고 야당의원에 대한 미행 사실을 밝힌 것은 상식 밖에 사건이었다. 취지가 「선의」였다할지라도 천원장의 발언은 듣는 사람들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따라서 발언 파문이 터진 16일, 이미 문책은 예고됐으며 시간만이 문제였다는 시각도 있다. 김대통령이 김종필(金鍾泌)총리의 귀국을 기다려 합당문제 등을 매듭짓고 조치를 취하려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정원장은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경질하더라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면서 『그동안 여기저기서 경질건의를 했다』고 설명했다. 천원장도 발언 파문후 1주일 동안 주변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원장은 22일 청와대 주례보고에서 『군인 출신으로 진퇴가 분명해야 한다』면서 『나 말고도 대통령을 보필할 사람은 많다』고 강력하게 사의를 표명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과정이 어찌됐든 파문이 터지고 1주일이 지난 뒤에야 경질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타이밍의 문제점」이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 당초부터 유임시키기 어려운 사안이었다면 인사조치가 좀더 신속하게 단행됐어야 한다는 비판이다. 1주일의 「문책 유예」 속에서 사람을 쉽게 내치지 않는 김대통령의 인정이 나타나지만, 동시에 국민 정서에 부합하는 결단과 과단성이 결여돼 민심을 이끌지 못한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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