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조건의 신랑을 만난 가난한 집 딸이 있었어요. 철 없는 딸은 기죽지 않으려고 남자 집에 걸맞는 혼수를 준비하려 했습니다. 이를 대기위해 친구에게 돈을 꾸는 등 별 짓을 다 하던 어머니는 지치고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소설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실화입니다』자식을 결혼시키느라 돈고생을 해봤던 부모들은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이다. 실속이야 어떻든 밖으로 과장되게 내 비치려 하는 잘못된 인식. 21세기 문턱을 넘어가면서 반드시 버려야 할 우리 생활속의 「과시문화」이다.
생활개혁운동을 하는 전문가 10명에게 21세기에 꼭 버려야 할 생활문화를 물었다. 입을 맞춘 듯 『과소비를 조장하는 과시문화』라고 대답했다. 인생의 새출발을 빚더미 속에서 시작해야 하는 결혼, 절반 이상이 쓰레기가 되더라도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을 차려야 하는 각종 집안팎 행사, 무조건 크고 비싼 것을 선호하는 소비의식….
이대근(성균관대 경제학과)교수는 『체면이라는 동양의 중요한 가치를 잘못 인식해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결과적으로 올바른 의미의 체면을 망쳐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허례와 과시의 선두주자는 혼례. 우리 민족의 혼례는 원래 공동체문화 속에서 예(禮)를 기본으로 한 검소한 마을축제였다. 산업사회가 되고 바깥 문화가 들어오면서 이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자들의 과시욕과 이를 동경하는 이들의 무비판적 추종이 어울려 현재의 왜곡된 결혼문화를 만들었다.
지난해 생활개혁실천범국민협의회(이하 생개협)의 조사에 따르면 부부 한 쌍의 결혼 평균비용(주택마련 제외)은 신랑 1,114만원, 신부 1,993만원으로 모두 3,107만원이었다. 웬만한 젊은 직장인의 한 해나 두 해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1인당 GNP를 감안하면 일본의 3.3배, 미국의 4.8배, 대만의 3.7배, 싱가포르의 7.3배이다. 체면과 「평생에 한번」이라는 인식이 가져온 허세 때문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8월에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1%가 「우리 결혼문화가 호화·사치스럽다」고 답했다. 그러나 문제점은 인정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눈과 귀를 닫는다.
혼례만큼 문제가 많은 것이 상례(喪禮)이다. 특히 매장풍습과 호화분묘는 사회·환경적인 의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다. 분묘의 수가 인구의 절반에 가깝고 분묘가 차지하는 면적은 여의도의 120배인 9만6,000여㏊로 전체 삼림면적의 1.5%에 해당된다. 매년 88㏊씩 늘어난다.
조문객 맞이부터 음식·술접대와 밤새기등 장례의 부속절차도 번거로움으로 가득하다. 틈새를 파고드는 장례업자들의 치졸한 바가지 상혼, 경건해야잘 자리가 술과 화투로 얼룩지는 빈소의 풍경은 우리 장례문화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호화·사치스런 경조사에는 친지와 지인들의 고통이 따른다. 우리 살림에서 경조사비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지출이 됐다. 최근 소비자 보호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1년에 평균 11.4번 경조사에 참석, 1인당 52만2,000원(추정액)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인 가족이면 연 300만원에 가깝다.
과시문화를 수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정부와 사회단체의 꾸준한 계도활동도 중요하지만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선행돼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지난해 SK그룹 최종현회장의 장례가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으로 치러진 후, 94년 50.1% 였던 「화장 지지율」이 65.2%로 상승했다.
세상이 끝장 나는 듯 마셔대는 잘못된 음주문화도 「버려야 할 생활문화」로 꼽혔다. 진민자 청년여성문화원이사장은 특히 청소년의 음주문화에 주목한다. 『젊은이들의 문란한 음주문화는 성문화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 밖에 핵가족 시대 이기적 인간형을 만드는 가정교육, 마구 쓰고 마구 버리는 낭비풍조, 무질서, 자신의 행실을 미화하려는 공치사문화, 한국적 시간관념 등이 버려야 할 생활문화로 지적됐다.
■이을 것
이어가야 할 생활문화를 꼽는 작업은 힘이 들었다. 그만큼 우리 생활이 혼탁해졌고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는 미풍양속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거론한 「이어가야 할 생활문화」는 「현재 불씨 정도로 사그라들었지만 다음 세기에는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할 덕목」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 중의 으뜸이 공동체의식. 서로 돕고 의지하는 우리의 상부상조 전통을 이어가자는 것이다. 주거환경이 도시화하고 거대해지면서 사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 눈으로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아직 대중매체등을 통한 익명적 상호부조의 아름다움이 남아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모에 대한 효와 경노사상등 윗사람을 공경하는 예절이 그 다음이다. 논리의 전개로 풀어질 수 없는 세대의 격차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예절이라는 것이다.
특이한 의견은 어머니의 손맛을 계승하자는 것. 단지 음식과 관련한 손맛 뿐 아니라 집안의 가풍이나 생활방식의 선택적인 계승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서구의 인스턴트 음식 공세가 우리 고유의 입맛 조차도 바꿔 놓는 상황이고 생활의 편의에 의해 전통적인 가족행사등이 차선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주목할만한 지적이다.
■도움말 주신 분들(가나다 순)
김성숙 박사·한국가정생활개선진흥회 연구원
문홍빈 생개협 간사
봉두완 생개협 운영위원장·광운대 신방과교수
신산철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결혼문화원 총무
이남주 생개협 사무총장
이대근 성균관대 경제학과교수
이동원 이화여대 사회학과교수
임정빈 한국가정생활개선진흥회장
진민자 청년여성문화원 이사장
황정선 소비자보호원 책임연구원
권오현기자
koh@hk.co.kr
■[굿바이20] 외형만 선진국, 내용은 후진국
「농군을 포함한 단순작업 노동자 96.3%, 12세 이상 인구 중 문맹자 79.8%, 대졸자 0.05%, 평균수명 45세, 도매물가 상승률 241.12%」. 불과 50여년 전인 1944년 5월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우리나라 인구 및 경제조사 통계자료이다.
20세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격동의 시대였다. 자원도 기술도 없는 가난한 농업국가가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는 산업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반세기가 채 걸리지 않았다. 경제수치만 놓고 보면 우리의 생활수준은 이미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다.
경제활동 참가율(96년)은 62%로 독일(57.3%), 프랑스(55.3%), 대만(58.4%)을 앞지른다. 1인당 원유 소비량(95년)은 1,912㎏으로 일본(1,767㎏), 프랑스(1,373㎏), 독일(1,260㎏) 등 선진국을 앞선다.
인구 10만명 당 고등교육기관 학생수는 5,198명(95년)으로 45년간 무려 41.3배가 늘었다. 인구의 고령화, 환경오염, 서구식 식생활의 영향으로 질병 패턴도 선진국형으로 바뀌고 있다. 10년 전에 비해 당뇨병이 124.5% 늘어난 것을 비롯, 심장병 81.1%, 대장암 79.5%, 폐암 56.1%의 증가율을 보였다(98년).
그러나 국민소득 1만달러를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뜨린 것도 잠시, IMF사태는 내실없는 물량 위주의 성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외형만 놓고 보면 선진국에 거의 근접해 가고 있지만, 삶의 질 차원에서 접근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 국민이 건강에 지출하는 비용은 국내 총생산(GDP)의 3.9%(95년). 미국(14.1%), 독일(10.4%), 프랑스(9.9%) 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산모 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20명(96년)으로 오스트리아·노르웨이(5명), 독일(6명), 그리스(2명) 등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높다. 영아 사망률도 신생아 1,000명당 9명(96년)으로 포르투갈(6.9명), 체코(6명)보다 낮다. 반면 남성 흡연율은 73%(95년)로 세계 최고 수준.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률(98년)은 OECD 회원국 중 1위로 남자(4.35%)는 2위인 포르투갈의 2배, 여자(2.06%)는 2위인 미국의 3배에 달했다.
IMF사태 이후 소득불균형이 심해져 삶의 질은 더욱 악화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이미 잘 사는 20%가 부를 독점하는 「20대 80의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실업률은 IMF 이전보다 2.3배나 높아졌고, 중산층 비율도 70%에서 43.6%로 떨어졌다. 올해 3분기 상위 20% 계층의 월평균 소득은 437만원으로 하위 20%의 82만8,400원에 비해 5.3배가 많았다. 외환위기 직전의 4.49배보다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진 것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柳錫春)교수는 『우리가 21세기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경제 성장에 걸맞는 내실 추구와 함께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확보가 우선돼야 한다』며 『서구적 복지국가 모델을 추구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 상부상조하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적극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