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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어떤약보다 값진 환자-의사간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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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어떤약보다 값진 환자-의사간 신뢰

입력
1999.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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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이는 62세 환자가 강원도 산골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온다. 당뇨병에 고혈압까지 겹쳐 오랫동안 고생해온 이 환자는 최근 남편을 잃고 혼자된 이후 심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보여 왔다. 자식이 없어 혼자 살기 어려워지자 먼 친척과 합류하기 위해 강원도로 이사갔다고 한다.그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3시간이 넘는 고생길을 마다않고 약을 타러 온다. 진찰실에 들어 오면 15분 정도 이것 저것 생활의 어려움을 털어 놓고는 너무 길게 이야기해서 미안하다며 약처방을 받아 진찰실을 나간다.

한 가지 버릇은 약을 탄 후 간호사에게 잊어버리고 말 못한 것이 있다고 졸라 내방에 다시 들어오는 것이다. 대개 별 내용이 없는 작은 사건을 3-4분 이야기 한 뒤 큰 한숨을 한 번 쉬고 돌아간다. 최근 증상이 호전되면서 우울증 약을 끊었기 때문에 타가는 약들은 모두 고혈압이나 협심증 약이다.

그런데도 먼 길을 무릅쓰고 정신과 외래를 계속 찾아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돌봐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힘든 삶의 내용을 마음껏 털어놓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의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오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이 환자를 면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이 채 못된다. 면담에 지불되는 상담료는 약 6,500원. 본인 부담이 절반 정도니까 약 3,000원은 환자가 내고 나머지는 보험회사에서 지불한다. 서비스의 질을 금전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내가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는 환자의 왕복 버스값보다 훨씬 싸다.

이 환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의료행위를 그 환자가 받아가는 약의 효과로만 인정하는 우리의 의식구조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환자가 받는 의료혜택은 몇 만원 어치의 약이 아니다. 그가 신뢰하는 의사와 함께 나눈 20분간의 시간과 그동안 이루어진 치료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

환자가 진지한 「돌바줌」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치료적 관계는 형성된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관계가 자꾸 사라져 가는 게 오늘의 의료환경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치료적 관계가 사라지면 결국 그 손해는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이호영·아주대병원 정신과 교수·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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