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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레이건의 치매, 남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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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레이건의 치매, 남의 일인가

입력
1999.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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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88) 전미대통령과 부인 낸시여사는 금실좋기로 유명했다. 둘다 영화배우 출신으로 고급취향이 대단했다. 특히 낸시여사의 호화로운 스타일은 남편의 재임시 수많은 구설수를 낳았다. 오죽하면 미국의 고속도로변 광고에 『바버라 부시 값에 낸시 레이건 스타일의 가구를!』이라는 문안이 등장했을까. 조지 부시 전대통령 부인 바버라의 수더분한 스타일을 낸시여사의 고급취향에 대조한 광고카피였다.백악관을 떠난 후 캘리포니아의 자택에서 은퇴생활을 하던 레이건 전대통령이 알츠하이머(노인성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은 5년 전인 94년. 낸시여사도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남편과 함께 고행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18일 C-스팬방송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레이건이 자신의 발병사실을 세상에 알렸던 편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 뒤 오늘날까지 병마와 싸워온 레이건은 이제 주변인사는 물론 부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에 빠졌다는 게 낸시의 비통한 고백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레이건은 자택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골프도 치고 수영도 즐겼다. 96년말 레이건에게 병문안을 갔던 한 외교관은 필자에게 『레이건 전대통령이 골프를 나가기는 하지만 중도에 느닷없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해 동반자를 당황하게 만들곤 한다』면서 병세악화를 걱정했었다.

그런데 낸시여사의 C-스팬 인터뷰에 따르면 요즘에는 손님을 받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지난 5년동안 남편을 간호해온 낸시여사는 알츠하이머를 「최악의 질병」이라고 규정했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병이 바로 알츠하이머다. 이 끔찍한 질병의 위험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서 레이건전대통령은 자신의 병을 공개했던 것이다.

본인에게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병환 공개는 미국민을 포함한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츠하이머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 우리 주변에도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우리는 남에게 알리지 않고 쉬쉬하는 정도가 한층 심하다.

레이건의 자택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샌타클라라에서 지난 해 9월 타계한 원로 가수 김정구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한 해가 저무는 이맘 때면 으례 TV에 나와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르던 그를 더이상 볼 수가 없다. 엊그제 TV를 보니 평양에 공연간 남쪽의 다른 가수가 그의 지정곡을 대신 부르고 있었다. 김씨가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 언론도 그를 예우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냥 「노환」으로 타계했다고만 알렸었다.

레이건 가족의 경우에서 보듯이 치매는 한 가정의 삶을 서서히 갉아먹어가는 악질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가 될 경우 외롭고 막막하다. 의료안정망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한층 심각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집계한 작년말 현재 우리나라의 치매환자는 25만 1,000여명. 이들 치매인구는 2010년에는 43만4,000여명, 2020년에는 61만 9,000여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겨우 5% 남짓한 생활보호대상자만이 무료로 치료혜택을 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같은 통계도 액면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집안의 수치라는 이유로 가능한한 치매신고를 꺼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고령화사회로 가는 문턱에서 치매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의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한때 불치명처럼 여겨졌던 결핵을 「크리스마스 실」로 거의 퇴치했듯이 치매와의 싸움을 위해 「실버 실(Silver Seal)」을 만들자는 의견이 제시된지도 꽤 됐지만 이렇다 할 정부 당국의 반향이 없다. 못 들은 것인가 , 진작 알아듣고도 짐짓 치매인 체 하는 것인가. /이상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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