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 땅에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탄생하는 기념될 날이며 …』81년 12월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서 열린 프로야구 창립총회에서 초대 커미셔너로 추대된 서종철(당시 한국반공연맹이사장)씨는 취임사를 읽어 내려갔다. 1900년대에 눈을 뜬 한국스포츠에 본격적인 프로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프로야구의 태동은 아마추어리즘과 더불어 프로페셔녈리즘이 한국체육사의 양대축으로 자리매김하는 혁명적인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프로야구출범에 담긴 뜻을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우연한 일로 역사가 바뀌는 경우가 있듯이 프로시대의 도래도 우연의 역사였다. 서슬이 시퍼런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81년5월께였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고교야구 해설자였던 이호헌씨는 MBC 고위인사의 부름을 받았다. 창사 20주년기념사업으로 프로야구팀을 창단하려던 MBC는 이호헌씨에게 창설계획을 요청했다. 정통성이 결여된 군사정권이라는 비난을 받던 신군부도 비슷한 시기에 프로스포츠를 도입하려던 차였다. 국민의 눈과 귀를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스포츠만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초대사무총장을 지낸 이용일씨가 가세하면서 프로야구출범은 급물살을 탄다. 이용일씨가 18쪽짜리 프로화계획서를 청와대에 제출하고 팀선정 등 물밑작업이 시작됐다. 난산끝에 서울(MBC), 부산·경남(롯데), 대구·경북(삼성), 인천·경기·강원(삼미), 전·남북(해태), 충·남북(두산) 등 6개연고지를 근간으로 팀을 창단했다. 프로야구는 82년 3월27일 MBC-삼성의 동대문경기를 시작으로 첫 장을 열었다. 프로야구가 단시간내에 최고 인기를 누린 배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망국병인 지역감정덕분이었다.
80년 국내 최초의 프로팀인 할렐루야축구단에 이어 81년 유공이 창단되면서 프로화의 기치를 내걸었던 축구도 야구에 선수를 뺏기기는 했지만 83년 5개팀으로 프로시대를 열었다. 같은해 전통스포츠인 씨름도 프로의 길로 들어섰다. 불과 2년새 군사정권의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 야구 축구 씨름이 아마티를 벗고 직업스포츠로 발돋움 한 것이다. 97년에는 농구까지 프로에 가세했다.
프로스포츠는 독재정권의 부산물이었지만 불과 20년도 못돼 국내스포츠의 기둥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직 미국 유럽과 비교할 수 없으나 시장규모만 수천억원에 달할 정도다. 프로스타들이 대중의 우상이 된 지 오래다. 이제 프로스포츠는 일상사가 됐고 억대스타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아직도 프로라고 말하기에는 미진한 점이 많다. 외국에서는 프로스포츠스타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돈과 명예를 함께 거머쥐고 있다. 팀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떼돈을 번다. 프로스포츠는 경제적 연관효과가 엄청난 거대산업으로 자리잡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업들은 아직도 프로팀을 PR용 액세서리정도로 여기고 있다. 돈 만 쓸줄 알지 돈을 버는데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정연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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