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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고사의 실제]'맥베스'일고 인간의 참된 길 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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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고사의 실제]'맥베스'일고 인간의 참된 길 논하라

입력
1999.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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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주제] 25일자-1월8일자25일자와 1월8일자는 김영민(金榮敏)연세대교수와 손동현(孫東鉉)성균관대교수가 각각 출제해 주셨습니다. (답안은 1,000자이내)

1월1일자는 신년특집 지면관계로 쉽니다.

■25일자 주제

(문제) 조선시대 문장가 김만중은 당시 사대부들의 한문학에 대해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낸 것』이라 비판한 바 있다. 다음 제시문을 읽고 이러한 비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한 후, 『우리말, 우리글의 소중함』이라는 주제로 논술하시오.

(제시문) 송강의 관동별곡, 전후 사미인가는 우리나라의 이소이나, 그것은 문자로는 쓸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악인(樂人)들이 구전하여 서로 이어받아 전해지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칠언시로써 관동별곡을 번역하였지만, 아름답게 될 수 없었다. (중략)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이 말이요, 말의 가락이 있는 것이 시가문부이다. 사방의 말이 비록 같지는 않더라도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서 가락을 맞춘다면, 다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가 있는 것은 유독 중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다.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무꾼이나 물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 하며 서로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하여도 그 진가를 따진다면, 정녕 학사대부들의 이른바 시부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다. (김만중, 『서포만필』에서)

■1월8일자

(문제) 새로운 「밀레니엄」(천년)이 시작되고 있다. 모두들 이 새로운 시작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다가올 미래의 문화에 대해 희망찬 기대를 걸기도 하고 또 심각한 우려를 갖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문화는 무엇보다도 「인공지능」(컴퓨터)과 「다매체 정보통신」(멀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에 의해 심대한 영향을 받으리라고 예측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이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아래의 글을 생각의 실마리로 삼아, 인쇄기술을 기초로 하는 「도서문화」에 비교해 볼 때 인공지능과 다매체 정보통신기술을 기초로 하는 이른바 「정보문화」는 어떤 특성들을 갖는지 간단히 열거하고, 그 중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이 「정보문화」의 앞날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 전망을 시도해 보시오.

(제시문) 개인과 사회의 문화와 삶 전체는 그 시대에 존재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양식에 의해 규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과 사회의 성장과 발달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핵심요소이고 인간존재의 기본요건이다. 이런 뜻에서 인류의 문명사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사에 다름아니라 할 수 있다. (추광영,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미래문화』중에서)

미래문화는 공간의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문화다. 뿐만 아니라 영역의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문화다.… 지금까지 공간과 영역은 정보의 유통을 차단하는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해 왔다. 그리하여 공간의 구획과 영역의 구획은 문화의 벽을 형성했다. …문화의 국지성(局地性)은 바로 이런 구획의 산물이다. 다매체 정보통신 기술은 공간과 영역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리하여 정보유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넓은 공간이 형성되었다. 이 자유의 공간이 바로 미래문화의 공간이다. (이명현, 『미래문화와 新文法』중에서)

■입선자 명단(9명)

서현고= 최유나 동작고= 강지훈 백암고= 최 정 유전강 한성고= 정재훈 한영고= 박종원 대일외고= 윤지훈 전기웅 유단비

■원고마감은 매주 월요일. 우편: 110-792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 한국일보 사회부 논술담당자앞 전화: (02)724-2313-8 팩스: (02)739-0266

■[논술강평] 출제의도 정확히 파악

강평을 쓸때마다 누누히 강조했던 것이지만, 주어진 주제를 두고 자신의 견해를 설득력있게 전개해야 하는 논술문을 쓸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나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한 후에, 주어진 주제를 두고 순발력있게 글쓰기에 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또한 다른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번 주의 문제는 특히 이러한 문제들에 초점을 두고 출제되었다.

제시문으로 인용되었던 부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치열하고 밀도짙은 작품으로 꼽히는 『맥베스』의 결말부분으로, 주인공이 던컨왕을 죽인 후 그의 아내의 죽음을 접하면서 혼자서 읊조렸던 독백형식의 시구이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시간은 총총걸음으로 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다. 어제라는 그 모든 날은 어리석은 자들이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비추어 왔구나. 꺼져라, 꺼져, 이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뿐, 잠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대 위에서 뽐내고 으시대지만 그때가 지나면 영영 사라져 버리는 가련한 광대. 그것은 백치가 지껄여대는 이야기, 떠들썩한 소리만 왁자지껄 높았지 필경 아무런 뜻도 없는 짓거리…

주인공 맥베스의 이 유명한 마지막 독백은 비록 연극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숨쉬고 있는 실존적인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크나큰 공감의 물결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과 흐름을 고려할때, 비록 이 독백이 이처럼 삶의 현실을 뚜렷하게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의의 군사들에게 쫓겨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비극의 주인공인 살인자 폭군의 심정에서 나온 감상적인 시이다. 또한 비록 맥베스가 이 대사를 통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조금도 뉘우침이 보이지 않고 비극적 현실과 대결하는 「인간다움」을 부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태도는 역사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인간은 풀잎처럼 일정한 시간 동안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운명에 놓여있지만, 신화 속에서 말하는 낙원을 상실한 후,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시작된 역사를 창조할 책임과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즉, 역사적 인간은 맥베스와는 달리, 개인적인 욕망을 초월하고 신(神)의 부름을 따라 역사적 믿음을 가지고 정의롭게 살며 인간의 비극적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의연히 대결하는 자세를 끝까지 잃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삶은 맥베스의 그것과 같이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황폐한 인간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분담하며, 타인과 더불어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인간은 그들의 삶을 결코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

수험생들이 주어진 문제를 잘못 파악하게 되면, 자칫 이 문제를 셰익스피어의 제한된 연극 속에서만 이해하려 할 수 있도 있다. 그러나 출제자의 의도와 요구는 지금까지 소개한 역사적 인간의 신념과 마지막 독백 속에 나타난 맥베스의 허무감을 포괄적으로 비교하는데에 있다.

최우수작으로 뽑힌 조효정(과천고)의 글은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은 물론, 주어진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적절한 순발력을 보이고 있다. 쓰기 힘든 도입부의 토픽 센텐스를 잘 처리했고, 글 전체의 논지에도 설득력이 있다. 결론부분이 교훈적인 것은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말의 경제성을 유지하며 명확한 주제의 전달에 성공하고 있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우수 1로 뽑은 윤영주(백암고)의 글 역시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가는데 적지 않은 순발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서론에 해당하는 도입부가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흘렀고, 이어지는 귀절과 전도되는 느낌이 없지않다. 또한 역사의식 속에서 개인적인 삶을 파악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수 2로 뽑은 정연경(일본 도쿄 세이센 국제학교)의 글 또한 주제를 제대로 파악한 후, 훌륭한 언어로 정성들여 쓰여진 짜임새 있는 글이다. 그러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맥베스가 지닌 지나친 욕망을 설명하는 부분이 장황해서 물음에서 요구하는 역사의식을 성공적으로 구체화 하는데 다소간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태동

'맥베스'읽고 인간의 참된 길 논하라

■최우수 조효정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연속과정이다. 이러한 인생의 양면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세상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의 맥베스는 그 중에서도 허무주의자를 대변하고 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아내의 죽음으로 괴로워한 나머지 인생을 죽음으로 가기 위한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맥베스처럼 삶을 소멸의 과정으로 단순화하는 시각은 인간의 참된 길이라 볼 수 있을까?

인간은 나름대로의 존재의의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또한 인간은 선을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도 사라지지 않는 악으로 괴로워하지만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가진 존재이다. 만약 이러한 존엄성과 당위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삶을 허무적이고 무의미하게 본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어차피 인간은 죽으면 모든 게 허사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이상의 실현보다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쾌락 추구에 몰두하는 경향을 낳을 것이다. 이러한 본능에 충실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가 하는 진지한 논의와 숙고 없는 삶의 태도를 초래해 인간의 행동에 기준이 되는 도덕의 존재를 무색케 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할 것이다.

또한 삶에 대한 의욕 상실의 결과는 새로운 예술의 창조나 제도의 개혁을 통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킨다. 만약 허무주의적 인생관이 과거에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다면, 중세의 암흑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성을 강조한 르네상스와 절대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인간의 위대한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 창조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허무주의적 인생관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로서의 개인의 역할을 간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허무주의 인생관은 사회적으로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역사 발전 과정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간과한 편협된 시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깨닫고 인생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함을 인식해야 하겠다.

■우수1 윤영주

인간은 누구나 꿈과 이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비록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쌓여 마침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꿈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 즉 과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제시문에서 나타난 맥베스는 결국 인간은 죽기 때문에 그동안의 시간들이 무의미하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물론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인생은 인간이 죽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또한 한사람의 인생이 그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위인전에서 볼 수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들은 죽은 후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업적을 남긴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후세들에게 살아 있는 역사적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훈을 남기고 존경심까지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인간은 문명을 이룩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며 살아 왔다. 그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의도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 방식이 변해가며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이것만 보더도 인간은 존재 자체로도 아주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이 존재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진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는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며, 누구나 그러한 삶의 태도를 지닐 때 인간성을 회복하여 참으로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야말로 새로운 삶과 희망의 세계를 향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이 정말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도록 올바른 마음가짐 뿐만 아니라 노력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수2 정연경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끊임없이 원한다. 우리는 그것을 「욕망」이라 부르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성취함으로써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고 그 기쁨을 맛본다. 그런데 역사 속의 성인군자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주장하며 인간의 욕망은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이 인간의 참된 길일까?

맥베스의 대사 중 「잠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욕망의 성취를 의미한다. 자신이 어떤 욕망을 이루었을 때 그 시간만큼은 그의 독무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욕망에 눈이 멀어 많은 것을 그르친 인물이 적지 않다. 지난 1000년간의 최악의 인물로 워싱턴 포스트지(紙)가 선정한 독일의 히틀러는 세계를 힘으로 정복할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13년 동안 권력을 누리면서도 더 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3,500만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13년의 세월은 그의 60년 인생과 비교해선 작은 티끌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에게 주어진 「잠깐의 시간」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히틀러는 그의 명예나 인생의 보람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이처럼 인간의 도덕적인 면에서나 때로는 역사적 면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맥베스는 『인생이란 떠들썩한 소리만 왁자지껄 높았지 필경 아무런 뜻도 없는 짓거리』라고 했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위해 끊임없이 요구하고 그 욕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경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일까? 인간의 안정된 생활을 위한 노력이 농업을 발달시켰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글자를 만들었다. 인간의 날고 싶은 욕망은 비행기를 탄생시켰고 대량의 신속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한 노력이 마침내 컴퓨터의 발명에 이른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구는 역사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며 모든 욕망을 버린다면 오늘날 인간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욕망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것이다. 앞면이든 뒷면이든 같은 동전인 것처럼 어떤 욕망도 무엇을 원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선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옳고 그름은 도덕적이고 역사적인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 도덕적이면서도 역사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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