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머지않아 서력 2000년이 옵니다. 새 천년이 다가오는지 천년의 마무리가 되는지 알쏭달쏭하지만 모두 새 출발을 하자고 야단이니 이 틈에 끼어 새해를 맞으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길라나 하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농사꾼 머리에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그야말로 「당신들의 새해」입니다.새해에는 국회의원을 새로 뽑습니다. 농사와 연관해 「뽑는다」는 말과 가장 빨리 연결되는 말은 잡초입니다. 무같이 뽑아서 좋은 것도 있지만 대체로 길러 보았자 소용없는 것들을 솎거나 없애는 것을 뽑는다고 합니다.
왕조시대를 거치고 식민지 백성으로 오래 길들여져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무늬만 민주주의였던 지난 50년동안 정말 잡초같은 국회의원들만 뽑았습니다. 버리려고 해치우려고 뽑은 게 아니라 국민 세금으로 애지중지 보살피려고 뽑았으니, 그동안 그 고생을 한 것도 눈이 삔 탓이거니 여깁니다. 적어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 정치판을 밭으로 볼 때 게으르고 철모르는 풋내기 농사꾼인 제가 가꾸는 밭과 어쩌면 이렇게도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둘 곡식이나 남새가 될만한 이들은 가뭄에 콩나기요, 나머지는 죄다 뽑아 버려야할 것들 뿐입니다.
의회라는 밭이 왜 이렇게 묵밭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짚이는 게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을 뽑는다고 하니까 저처럼 물정 모르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 여의도 한구석에 두엄터가 있는데 거기는 잡초를 뽑아서 내 던지는 곳이겠거니」여긴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긴 세월에 걸쳐 거수기, 날치기, 뇌물꿀꺽, 지방색골, 독재울타리, 빨갱이 제조기들만 용케도 뽑아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겠습니다. 국회의사당이라는 곳은 난지도 같은 쓰레기 하치장도 아니요, 두엄터도 아닙니다. 우리가 애써 가꾸어야할 소중한 텃밭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살펴보니 온통 잡초들로 가득합니다. 내년 4월에는 죄다 뽑아버리자, 그리고 거기에 제대로 된 곡식이나 남새 씨앗을 뿌리로 잘 가꾸자, 그러지 않으면 그나마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기 바쁜 살림 다 거덜나겠다 하는 각오로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말부터 바꾸어야겠지요. 국회의원을 「뽑는다」고 하지말고 종자 고르듯이 「고른다」고 합시다. 씨앗을 고르는 데는 몇가지 기준이 있어야 겠습니다. 우선 살림에 보탬이 될만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고른 종자들은 서민들의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꽃씨나 수박씨 같은 것은 보기 좋거나 먹음직스러워도 눈요깃거리나 간식거리밖에 안됩니다. 지난 50년동안 눈에 속아 혀에 속아 그런 것들만 골라온 결과 지금 우리 주곡 자급률은 해마다 떨어져서 25%도 채 안되고 잡곡 자급률은 5% 남짓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벼 보리 밀 콩 같은 주곡 종자를 고릅시다.
다음에 외국산 개량종은 고르지 맙시다. 먼저 토종을 고릅시다. 유전자 조작, 방부제, 성장촉진제 위험을 덥시다. 덧붙여서 해묵은 씨앗은 고르지 맙시다. 기력이 떨어져 싹틀 확률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종자 큰 것에 현혹되지도 맙시다. 작지만 탱글탱글하고 때깔 좋은 것을 고릅시다.
마지막으로 여의도의 토양 기후도 고려에 넣읍시다. 제주도 유자 씨앗을 여의도에 뿌려 보았댔자 탱자밖에 안됩다. 제 지방에서 잘 되는 씨앗이라고 안심하지 맙시다.
이제 새로 시작되는지 마감하는지 모를 새해를 맞이하여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여의도 농사 한번 본 때 있게 지어봅시다.
윤구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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