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대를 가면 좋으련만 도무지 말들을 안들어요. 전학년 장학금에 유학까지 보내주고 학위 따오면 교수직을 보장해준대도 싫다니…』서울과학고 송영재(宋永在·60) 교장의 탄식이다. 이 학교에서는 지난 7월말까지 2학년생 77명이 자퇴했다. 서울대에 진학할 목적이었다. 과학고는 수재들만 모였기 때문에 내신성적에서 일반 고교 출신보다 불리하다. 일반 고교에서 전교 10등을 할 학생이 이 학교에서는 100등 밖으로 밀리기 일쑤다. 따라서 내신성적을 수능성적 비율로 대신해 주는 검정고시를 보겠다는 계산이다. 그 좋은 시설과 우수 교사들을 마다하고 학원생으로 「전락」을 자처하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도 잘 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아무리 일을 잘하고 노력해도, 「일류대」 졸업장이 없으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너무도 잘 안다. 대학 졸업하고 20년을 근무했어도 승진때가 되면 『그 친구, 학교 어디 나왔지?』하고 따진다는 것을. 동문의 도움이 평생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잘 안다. 오죽하면 대학을 지나 고등학교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K1, K2, 「어나더 K」, M고 운운할까?
정계 관계 재계까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극소수 대학 출신들이 강력한 집단을 형성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너도나도 적어도 내 자식은 그 서클에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을 정도다. 연말이면 여기저기서 열리는 고교나 대학동창회도 대부분 『우리도 뭉치자』라는 말로 끝난다. 뭉쳐서 나쁠 것이 없다지만 일류학교 졸업생들은 그동안의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서, 비일류학교 출신들은 새로운 기득권을 만들기 위해서임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학벌주의를 타파해야할 정부에서조차 이런 학벌주의를 부추기기도 한다. 예컨대 연구중심대학 육성을 위한 「두뇌한국21」(BK21) 사업에서 서울대와 연세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 등이 사업 대부분을 따냈다. 문제는 교육부가 이 사업 응모자를 접수하면서 응모자격 자체를 일류대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설정했다는 데 있다. 교육부 관계자조차 『어차피 몇몇 대학이 선정될 텐데 응모서류 많이 받아봐야 뭐합니까』라고 말한다.
뿌리깊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될 학벌주의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더 병들게 할지는 생각만 해도 암담하다.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柳錫春)교수는 『학벌주의의 폐해는 지역감정에 결코 못지 않다』며 『뉴 밀레니엄에는 얽히고 설킨 견고한 학벌주의의 틀을 깨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광일기자
kilee@hk.co.kr
■버릴 유산
『대학은 우리 사회를 학벌 위주의 신분사회로 재편성하는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전진기지입니다』
국민대 김동훈(40·법학)교수는 최근「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저서에서 학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김교수는 극단적으로 학벌을 「현대판 계급제」에 비유한다. 과거의 혈연적 신분계급은 사라졌지만, 대학이 「씨족」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능력이나 실력보다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풍조는 지역감정과 함께 청산해야할 대표적인 유산이다. 특히 명문대 중심의 대학 서열화는 교육개혁을 가로막는 주범이자 입시전쟁과 부패의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학벌주의 폐해의 정점은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소수 명문대출신 엘리트의 권력 독점현상이다. 지난 5월 서울대총학생회의 초청으로 강연한 전북대 강준만(康俊晩·신문방송학)교수는 『서울대 출신들이 우리 사회의 모든 의사결정구조와 권력, 금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부패의 온상이 될 소지가 많다』며 「서울대망국론」을 거론, 파문이 일기도 했다.
2002년부터 적용되는 새 대학입시제도 역시 이같은 학벌위주의 풍토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고서는 학생들의 소질이나 적성, 특기 등으로 선발하겠다는 취지는 무색해질 수 밖에 없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학벌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고액과외를 시키고, 심지어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입시전쟁으로 내모는 소모전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직업교육이 정착되지 못한 것도 고질적인 학벌중시 풍조탓이다. 전국 시·도교육청이 이달초 2000학년도 실업계 고교 원서접수를 마감한 결과 무더기 미달사태가 속출했다. 서울에서는 실업계 79개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39개교에서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서울 동양공고 정재훈(鄭在薰·42)교사는 『정부와 학교에서 아무리 직업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학벌중심의 사회풍토가 고쳐지지 않는 한 해결되기 어렵다』며 『인문계와 실업계 고교를 학생들의 성적순으로 평가하고, 대학진학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는 교육환경에서는 실업교육은 발디딜 틈이 없다』고 한탄했다.
학벌주의가 국가전체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지연(地緣)과 함께 연줄사회를 만드는 고리역할을 하는데서 비롯된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체계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학연, 지연과 같은 전 근대적인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외국 언론들이 지적한다.
교육전문가들은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학부모 등 사회구성원의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기업체에서는 외형적인 간판보다 능력위주로 인재를 채용하는 인사관행이 정착되어야 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정정화기자
jeong2@hk.co.kr
■이을 유산
16일 낮 12시. 서울 지하철 3호선 수서행 전동차가 안국역을 지날 때쯤이다. 승객이 드문드문한 가운데 7살쯤 돼 보이는 꼬마가 이 손잡이 저 손잡이를 옮겨잡고 공중곡예를 부리며 『아아아∼!』 소리를 지른다.
디즈니 만화영화 타잔 흉내를 내는 것이다. 부모는 자리에 앉아 「기가 뻗칠대로 뻗친」 아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이, 귀여운 것. 정말 예쁜 내 새끼야. 기죽이지 말아야지. 험한 세상 손해 안보고 살아가게 하려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승객들은 이맛살을 찌푸릴 뿐, 여기저기서 핸드폰 소리만 시끄럽다.
20세기의 마감을 15일 남겨둔 1999년 12월16일의 대한민국 지하철 풍경이다. 다. 지하철에서만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예절이 사라진지 오래다. 남에 대한 배려는 커녕 기본 예의도 없다. 전통문화연구회 이계황(李啓晃) 회장은 『기본예의가 안됐는데 아무리 많이 배운들 무엇에 쓰겠느냐』고 개탄한다.
독일 베를린에서 근무했던 한 상사원은 『베를린에서 버스를 타보면 제 세상 만난 듯이 떠드는 아이들은 거의 미군 자녀들』이라며『애 어른 할 것 없이 우리처럼 무례한 행동을 용납하는 사회도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지적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전통식 예절교육이 실종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동의한다. 무례한 인간을 양산하는 부패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식의 거창한 접근을 잠시 접어둔다면, 『전통식 예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회장은 『초등학교에서 「사자소학(四字小學)」을 가르치자』고 제안한다. 사자소학은 조선조 500년간 어린이용 국어·도덕교과서였던 「소학」을 쉽게 축약한 책.
현재 초등학교 1∼6학년의 도덕시간은 주당 1시간밖에 안된다. 교과서 내용도 개념적인 설명 위주로 돼 있어 구체성이 약하다. 반면 사자소학은 일상의 행동거지를 낱낱이 일러준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나를 부르시면 빨리 대답하고 달려가라. 부모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거스르지 말고 게을리하지 말라.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나간다고 말씀 드리고 나가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뵙고 다녀왔다고 말씀 드려라』 등등.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박광민(朴光敏) 연구위원은 『사자소학에서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된다」는 식의, 현대에 맞지 않는 부분은 버리고 최대한 현대화해 가르치면 효과가 클 것』이라며 『생명존중이나 환경의식, 지구촌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 등 현대적인 덕목은 별도로 추가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교육부 이수일(李修一) 교육과정정책심의관은 『내년부터 도덕교육을 강화한다』며 『소학처럼 좋은 책은 당장이라도 교장 재량으로 특활시간에 가르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광일기자
kilee@hk.co.kr
■[굿바이20] "경제위기 한몫한 한국병"
『우리 집사람은 출신학교에서 학위를 받는 것이 오히려 힘들었습니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 인요한(印耀翰·미국명 존 린튼·40·사진)소장이 한국의 뿌리깊은 학벌주의에 대해 밝힌 첫마디다. 그의 부인(37)은 86년 콜럼비아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으나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는 부인의 예를 들며 『대부분의 외국학교는 교수가 지도한 학생들을 끌어준다거나, 교직원을 임용할 때 학연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한국과는 정반대』라며 개방적이어야 할 교육기관의 폐쇄성을 문제삼았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아는 사람에게는 잘 해주지만 적에게는 가장 무섭게 대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며 30여년을 한국에서 보낸 느낌을 밝혔다. 그는 『학벌과 학연 등에 얽매인 사회 풍토 때문에 최근 경제 위기를 맞는 등 호된 대가를 치른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인소장은 또 한국에서는 필리핀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문제삼곤 하는데 이런 것도 미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학에 대한 관심과 실력, 환자에 대한 애정이 있으면 진료에는 문제가 없을 텐데 졸업장 때문에 이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미국에는 의사 중 연구를 주로 하는 의학 교수진(M.D.)과 개인병원 등에서 진료를 주로 하는 의료진(Dr. of Osteopathic Medicine) 등 두 가지가 있다』며 『학벌에 관계없이 환자들을 잘 진료하면 최고의 의사』라고 말했다. 100여년 전 한국에 선교사로 온 외증조부부터 4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인소장은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가장 전근대적인 관습』이라고 비판했다.
배성민기자
gaia@hk.co.kr
■[굿바이20] "대학졸업장으로 못버텨"
교육분야 -21세기 세계는 평생교육
지난 3일 IMF 2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열린 국제포럼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도널드 존스턴 사무총장은 「한국의 교육개혁」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조세프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수석부총재, 휴버트 나이스 IMF 아·태담당국장 등 다른 발제자가 경제·금융·산업부문에 논의를 집중한 데 비하면 상당히 의외였다.
존스턴 총장의 발언요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한국 정부는 대량생산과 노동집약적 산업을 위한 노동자 교육에 맞춰져 있는 교육제도를 지식기반사회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내년 6월 OECD와 세계은행이 이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한국 정부가 교육과 개혁에 대한 투자를 효율적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OECD 회원국으로 통칭되는 선진국들은 80년대부터 지식이 경제발전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시대적 변화에 맞춰 교육제도를 지식기반사회에 맞는 형태로 개혁했거나 개혁중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컴퓨터를 활용한 교육을 시작, 90년대 들어 학교정보화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확보했다. 특히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교까지 완전 인터넷으로 운영되는 가상학교(Cyber School)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가상대학은 특히 직장인들에게 인기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다양한 학습기회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대학 졸업장 하나로 버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세계의 흐름과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섭취하고 자기계발에 힘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지식기반사회가 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에 따르면 『21세기에는 한 인간이 평생에 적어도 3개 이상의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걸맞는 교육방식이 평생교육. 우리나라도 걸음마 형태로나마 올해 평생교육법을 발효시켜 각종 지원을 하고 있다. 이 평생교육의 시대에, 출신 학교로 인간의 상당부분을 평가하는 풍토는 아무리 생각해도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다.
/이광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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