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46)은 한국축구 최고의 영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유럽무대 진출이 힘든 게 우리 축구수준이지만 태국 버마 등과 견주었던 70년대 차범근의 「분데스리가진출」 소식은 「센세이션」이었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스타들의 경연장이었다.기록상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첫 출전은 79년 8월11일 프랑크푸르트-도르트문트의 79-80시즌 개막전이다. 그러나 그의 데뷔전은 78년 12월30일이 더 정확하다. 12월25일 다름슈타트와 6개월 가계약한 차범근은 이날 보쿰전에 레프트윙으로 77분간 뛰었다.
당시 일간스포츠는 특파원기사를 통해 「차범근은 연말연시 서독신문들의 스포츠난을 흥분시킨 표제였다. 차범근은 축구왕국 서독에 「꽝(독어로 BUM)」하는 폭발음과 함께 충격을 던져 주었다」고 전했다.
이 경기서 「차붐」이란 애칭을 얻은 차범근은 군제대 문제로 79년 7월13일 브레멘팀의 입단테스트를 거쳐 비로서 분데스리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이날 연습경기서 혼자 4골을 넣은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와 연봉 30만마르크(약 7,800만원)에 승용차와 주택을 받는 조건으로 계약한다.
데뷔전서 특유의 스피드와 폭발력을 선보인 차붐은 최고 권위의 키카지에 「금주의 베스트11」에 뽑혔다. 데뷔 3번째 경기인 8월28일 브룬슈비크전서 첫 골을 터뜨린 차범근은 이어 3게임 연속득점과 함께 단숨에 스타덤에 올라 섰다.
매주 차범근의 골소식은 국내 축구팬들에게 「신기함」 그 자체였다.
83~84시즌 레버쿠젠으로 옮긴 차붐은 89년6월17일 카이저스라우테른전을 마지막으로 10년간의 분데스리가 생활을 성공적으로 끝낸다. 이때까지 차붐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외국선수 최초의 300게임출장과 외국선수 최다골인 98골을 기록했고 팀의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을 두 번이나 이끌었다.
차붐은 재독동포들에게는 자긍심이었다. 동양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는 차붐으로 인해 크게 알려졌다. 차붐얘기만 나오면 안 풀리던 사업도 잘풀렸다고 말하는 동포실업가도 많았다.
한국팀의 프랑스 전지훈련중에는 차붐의 전화 한 통화로 특급호텔 주방장이 주방을 빌려줄 정도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축구전문지 「월드사커」가 정몽준대한축구협회장과 함께 차붐을 「20세기 축구에 영향을 미친 100인」중 한명으로 선정한 것은 충분히 근거있는 것이다.
차붐의 성공비결은 무엇보다 성실함과 근성덕이다. 부인 오은미씨와 연애할때도 정해진 훈련시간만 되면 줄넘기를 했고 옛 스승이 모처럼 독일을 찾아왔을 때도 잠잘 시간이 되면 침대로 올라 가는 철저한 자기관리의 소유자였다.
은퇴를 선언한 차붐에게 레버쿠젠구단은 『당신은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의 귀감이 되니까 팀에 있어달라』며 만류할 정도였다. 선수로서 대성했지만 지도자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최근 중국 선전 핑안감독직에서 1년만에 중도 하차하기까지 지도자생활은 곡절의 연속이다.
하지만 레버쿠젠구장에 지금도 걸려 있는 그의 대형사진은 차붐의 분데스리가신화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유승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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