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여년동안 한국민의 애증(愛憎)의 대상이었던 주한 미공보원(U.S.Information Service, USIS)이 10월1일자로 소문없이 간판을 내렸다. 미국무부의 조직 통폐합조치로 워싱턴의 상급조직인 미공보처(USIA)가 국무부에 통합된 데 따른 것이다. USIS의 새 문패는 주한미대사관 공보과(Public Affairs Section)로 정해졌다. 「아메리칸 센터」 「아메리칸 하우스」「미문화원」등으로 불리던 세계 여러나라의 USIS도 각각 현지 대사관에 흡수돼 간판을 새로 달았다.미군정 말기인 48년의 OIC(Office of Civil Information)를 모태로 한 주한미공보원은 49년 1월1일자로 한국에 사무실을 낸 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온갖 풍상을 겪으며 이 땅에 「미국식 가치」의 전파에 힘써왔다. 미공보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반정부 시위자들의 은신처인 동시에 그들의 손쉬운 공격대상이기도 했다.
60년 이승만(李承晩)독재 타도를 외치다 경찰에 쫓기던 대학생들이 경찰의 발포와 곤봉세례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이 서울시청 근처의 USIS였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진압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추궁하려는 학생들이 화염병세례를 퍼붓거나 강제점거를 기도했던 곳도 서울 부산 광주 대구등의 USIS였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금은 집권층에 몸담고 있는 당시의 반체제인사들이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피신하기도 했으며, 당국의 언론검열로 삭제된 타임 뉴스위크등의 한국관련 기사 전문(全文)을 얻으려는 대학생과 식자층의 발길도 잦았다.
일반인에게 USIS의 존재를 크게 알린 2가지 사건은 82년의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과 85년의 서울 미문화원 도서관 점거사건이었다. 85년 5월23일 정오께 시작된 서울의 도서관 점거사건은 2박3일 동안의 진을 빼는 협상 끝에 다행히 평화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부산에서는 도서관을 이용하러 왔던 여학생이 애꿎게 목숨을 잃었다.
역대 USIS원장들은 80년 5월의 광주사태 이후 격화일로를 치닫던 반미운동의 배경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다. 60년 이승만대통령의 하야에 나름대로 공헌한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미국측은 80년대 들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가던 반미주의의 뿌리를 여러 경로를 통해 캐보려 노력했다.
여러 갈래의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미국이 4·19 당시를 제외하고는 한국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해왔다는 인상을 주어온 사실이 반미주의의 한 배경인 것만은 확실하다. 반미가 아닌 반정부 시위의 장소로 USIS가 선택되곤 했던 사실에서도 미국정부와 권위주의적인 한국정부를 동일시했던 시위대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문민정부에 이은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이 땅의 반미주의열기는 급속히 식어들었다. 특히 IMF 이후에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창해온 미국정부에 대한 대다수 젊은이들의 인식도 눈에 띄게 바뀌고 있다는 게 미대사관측의 관측이다. USIS로서는 초창기 당시의 비교적 좋은 이미지 속에서 문패를 내리게 된 데 대해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주한미대사관 관리들은 USIS시대의 마감이 기존 업무의 축소나 커다란 변경을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미공보원의 마지막 원장인 제레미 커튼씨는 USIS의 주요 활동이었던 공보, 학술·문화 교류, 주요 인사의 미국 초청프로그램등은 새로운 조직체계 아래서도 변함없이 지속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미국에 대한 대학생들의 적대감이 지난 10여년 동안 크게 줄어들었다』고 강조하고 『미대사관은 USIS의 장구(長久)하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커튼씨의 다짐은 다행스럽다. 민간차원의 교류확대로 한미양국간의 공식적인 협력분야가 크게 줄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정부차원의 협조는 양국관계 증진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대부분을 우리와 함께 해온 USIS의 새로운 자리매김이 보다 성숙한 동반자관계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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