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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관전노트] 장-루이부부 깊어가는 '바둑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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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관전노트] 장-루이부부 깊어가는 '바둑금실'

입력
1999.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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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국기원 본선 대국실. 명인전 2차예선 결승전, 유창혁 9단과 루이나이웨이 9단의 대국이 벌어지고 있다.올해부터 명인전 본선 진행 방식이 토너먼트에서 8명 리그로 바뀌었기 때문에 본선 진출국 한 판은 어느 때보다도 의미가 중차대하다.

대국자들도 무척 진지한 태도다. 바둑이 한창 무르익어 엄청난 대마 싸움이 벌어졌다. 피차 한 수만 삐끗하면 당장 바둑이 끝나 버리는 긴박한 형세다.

루이는 진작부터 초읽기에 몰려 있는 상황. 한 수 한 수를 둘 때마다 가차없이 초를 읽어 대는 바람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이때 옆에서 아내의 고전하는 모습을 지켜 보던 장주주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더니 녹차 한 잔을 타 가지고 들어와 루이에게 건넨다. 아내의 선전을 기대하는 무언의 응원이다.

남편이 전해주는 찻잔을 받아 드는 루이의 얼굴에 방긋 미소가 떠오른다. 짧지만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애석하게도 바둑은 유창혁의 승리로 끝났다. 루이의 얼굴에 잠깐 서운한 빛이 스쳤지만 곧바로 마음을 추스린 듯 지난 수순을 바둑판에 늘어 놓으며 유창혁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묻는다.

비록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유창혁도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을 하고 조금 후에는 뒤에 서 있던 장주주까지 합세해서 자못 진지하게 복기가 행해졌다.

승부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무언가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듯 정말 열심이다. 요즘 장-루이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쪽의 바둑이 있는 날이면 거의 예외없이 볼 수 있는 대국실 풍경이다.

장-루이 부부는 철저하게 바둑으로 맺어진 사이다. 장이 62년생, 루이가 63년생으로 한 살 터울인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0대 초반 상해 중국 체육학교에 함께 입교하면서부터.

이어서 같은 집훈대 소속으로 둘은 숙식을 함께 하며 바둑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서로 어린 나이여서 사랑의 감정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각기 고향을 떠나 미국과 일본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90년 잉씨배에 함께 출전한 것을 계기로 다시 만나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트고 결혼에까지 골인했다.

지난 10여년간에 걸친 오랜 유랑생활을 끝내고 4월부터 한국에 정착한 장-루이 부부는 요즘 정말 원없이 바둑을 즐기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바둑에서 시작해서 바둑으로 끝난다. 어찌 보면 「바둑에 걸신이 들린 사람들」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니며 그토록 원했던 바둑을 실컷 두면서 부부간의 정을 도탑게 다져 가는 장-루이 부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프로기사들이 아닌가 싶다.

/바둑평론가=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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