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엔 아이들의 가슴이 설렌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겨울방학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해동안 어린이들이 가장 고대하는 날은 설날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이 아니다.맛난 것 먹고 태 나게 차려입지만 그때는 포만감 이상을 얻기 힘들다.
크리스마스는 그런 날과 다르다. 「기다림」 이 있기 때문이다. 산타클로스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세상 모든 아이들이 무언가를 받기로 되어있는 1년의 꼭 하루. 그 설렘으로 한 해의 어떤 날보다 아이들은 작은 흥분 속에 빠진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기나긴 겨울방학.
책을 선물받으면 아이들은 실망할 지 모르겠다. 게임 CD롬이나 연예인 캐릭터를 더 값지게 여기는 아이들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정성스럽게 고른 책을 아이들에게 주고, 그 책을 두고 부모와 아이가 이야기 나눈다면 아이들도 이런 「낡은」선물이 꽤 값어치 있는 것인줄 알게 될 테다.
책을 고를 때부터, 그것을 주고 난 뒤까지 어른의 정성이 아이들을 키운다. 한국일보는 어린이도서연구회와 어린이 전문서점인 일산 동화나라 그리고 교보문고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한 어린이 책을 골랐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에게
1, 2세 유아를 위한 책은 대개 일정한 교육을 목적으로 해서 전집으로 나온 것들이 많다. 한글 깨치기, 집중력 늘리기 훈련을 위한 방문판매 책들이 그런 종류다.
말 재주도 늘고, 귀여움도 부릴 줄 알면서부터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볼 수 있다. 그림책은 아직까지 외국 것을 번역한 책들이 많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우리 그림책도 이런 책들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독특하면서 창의성 높은 그림책 만들기로 세계에서 이름 있는 일본 사람들도 한국 책들을 보고 놀랄 정도니까.
철학자 윤구병씨가 글을 쓰고 이태수씨가 그린 우리 동화 「우리끼리 가자」(보림 발행)에는 겨울 산 속의 모습이 있다.
산 속 동물들이 산양 할아버지에게 옛날 이야기 들으러 가는 과정을 통해 겨울 숲과 숲 짐승들의 겨울나기를 한눈에 보여준다.
연필로 세심하게 그린 흑백의 동물들이 깊은 인상을 준다(3, 4세 용). 영국 작가 캐서린 월터스가 쓰고 그린 그림동화 「오늘밤 내 동생이 오나요?」(이화정 옮김, 웅진 발행)는 아기곰의 천진난만하고 앙증스런 행동을 담았다.
알피는 엄마곰에게 곧 동생이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겨울밤도 자지 않고 기다린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아기곰은 동생을 찾는다며 혼자 길을 나선다.
비버, 들소, 퓨마를 만나 『네가 내 동생이니?』하고 묻지만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 품에서 갓 태어난 동생이 잠든 모습을 본다는 이야기(3, 4세 용).
「책 읽어주세요, 아빠!」(김서정 옮김, 한국프뢰벨 발행)는 동화에 얽힌 꿈과 환상을 그린 책이다. 저녁마다 안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빠. 하지만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책 읽기를 그만두자 안나는 뒷 얘기가 너무 듣고 싶어졌다. 잠도 오지 않는다.
그때 사자, 뱀, 고릴라 등 동물이 나타나면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영국 그림동화 작가 니콜라 스미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 벌어지는 꿈 같은 일들을 그림으로 옮겼다(3, 4세 용).
독일 그림동화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비룡소 발행, 유혜자 옮김)에도 생활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기발한 상상력이 있다. 새로 이사온 위층 아이들은 조금만 떠들어도 쫓아올라오는 아래층 할머니 때문에 점점 활기를 잃어간다.
아이들이 떠들지않자 할머니는 무슨 소리든 들으려고 자꾸 귀를 쫑긋거리고, 마침내 귀가 커지는 병까지 생겼다. 「못 들어서 생기는 병」을 낫게 하려면 막 소리를 내야 한다는 처방이 내려지고 아이들과 할머니는 화해한다.
등장인물들의 표정 묘사와 도시 분위기 물씬 풍기는 그림이 볼만하다(5, 6세 용). 동화작가 채인선씨가 쓰고 이억배씨가 그린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재미마주 발행)도 할머니 이야기.
무엇이든 많이, 크게 만드는 손 큰 할머니가 설날에 숲 속 동물들과 커다란 만두를 만들어 먹는다. 익살스럽고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과 민화를 본 딴 동물 그림이 한껏 재미를 준다(5, 6세 용).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볼 책들은 그림보다 글이 중심이다. 이야기 구성에 신경써야 한다. 너무 천진난하기보다는 현실에 바탕하면서 생활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동화를 살펴 고르면 좋겠다.
「새 친구가 이사왔어요」(중앙M&B 발행)는 이스라엘 창작 그림책. 5층 집의 빈 방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오는 이야기, 그림을 그리면서 아빠와 딸이 나누는 대화, 호두에 숨겨진 비밀을 찾는 사람 등 3편의 이야기를 통해 이웃 사귐, 상상력과 분별력을 가르친다.
이스라엘 시인 레아 골드버그가 쓴 글을 박미영씨가 옮겼다. 슈무엘 카츠의 그림은 화려하지 않지만 붓 놀림이 생동감있어 좋다(초등 1년 용).
도시로 전학온 아이의 생활을 그린 「짜장, 짬뽕, 탕수육」(재미마주 발행)도 친구 이야기를 담았다. 이사 온 종민이는 새 학교에서 친구들의 놀림에 시달린다.
하지만 종민이는 기 죽지 않고 갈등을 극복하는 씩씩한 아이다. 작가 김영주씨는 아이들 사이의 반목과 따돌림을 아이들끼리 얼마나 스스럼없이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고경숙씨의 수채 그림이 정답다(초등 2, 3년 용).
「학교에 간 개돌이」(창작과비평사 발행)는 학교와 집을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짧은 동화. 동화작가 김 옥씨가 쓰고 김유대씨 등 세 사람이 그린 동화집에서는 아이들의 순진함이 어른이나 학교의 권위와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일, 아이들의 마음에 담긴 꿈의 세계를 볼 수 있다(초등 2, 3년 용). 「말괄량이 삐삐」를 쓴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에밀은 사고뭉치」(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발행)는 악동 에밀의 소동을 그리고 있다.
수프 단지 뒤집어쓰기, 잔칫날 사라지기, 축제에서 도둑 잡기 등 소동을 몰고다니는 에밀의 발랄함이 재치있는 글에 담겼다(초등 2, 3년 용).
러시아 작가 푸쉬킨 동화 5편을 묶은 「푸쉬킨 동화집」(이항재 옮김, 해나라 발행)은 사회성이 두드러진 책이다. 봉건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에다 환상의 요소를 더해 아이들이 도덕에 눈 뜨게 만들어준다(초등 2, 3년 용).
이원수 선생이 쓴 동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책 「이원수 시에 붙인 노래들」(백창우 지음, 보림 발행)은 「고향바다」 「염소」 「어디만큼 오시나」 등 39곡의 노래 악보와 시, 해설을 담고 있다.
동시의 아름다움을 노래로 즐기도록 한 책이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 테이프 2개가 함께 들어있다(초등 저학년 전체).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에게
학년이 높아질수록 사회 문제를 직접 다룬 동화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외국 책보다 우리 동화들의 숫자가 많다.
이런 때일수록 아이들이 책을 잘 가려서 읽도록 이끌어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위인전이나 유명 동화라도 누가 번역을 해서 어떻게 편집해 만들었느냐는 데까지 신경써서 책을 골라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 동화작가 마가렛 데이비슨의 「루이 브라이」(이양숙 옮김, 다산기획 발행)는 세 살 때 시각장애자가 된 브라이가 점자를 만들기까지 이야기를 담은 전기 동화. 끝없는 도전을 통해 장애인이 자신의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눈물겹게 그리고 있다.
정상인들이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특별한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도록 만든다(초등 4년 용).
「가장 소중한 성탄 선물」(노재윤 옮김, 서광사 발행)은 이탈리아 동화. 한 아이가 죽은 오빠를 위해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 편지가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 준다는 이야기 등 14편의 짧은 동화를 담고 있다.
작가 리아 가리니 알리만디는 가족이 소중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와 똑같이 중요한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초등 4년 용).
영국 동화작가 매리 드 모건의 「피오리몬드 공주의 목걸이」(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발행)는 결혼으로 구속받기 싫어하는 공주와 숭고한 사랑을 나누는 부부 등 3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쁘고 연약하기만 한 통념의 공주를 벗어난 인물 묘사가 재미있는데다 떠돌이 악사 아라스몬 부부 이야기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실감케 한다(초등 4년용).
작가 박기범씨가 쓴 우리 동화 「문제아」(창작과비평사 발행)도 단편동화집.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늘 부닥치는 문제 상황과 문제아가 아이 탓만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아」를 비롯해 10편의 동화가 실렸다.
건강했던 한 남자가 IMF 체제에서 노숙자로 변해가는 과정 등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아이들의 눈으로 보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전학」 「독후감 숙제」 등 재미난 동화도 함께 있다(초등 5, 6년 용).
「훈이와 장산곶 할아버지」(푸른나무 발행)는 초등학교 때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인이 된 지훈이가 할아버지와 살아가는 이야기다.
작가 우봉규씨는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어렵게 살지만 갈등과 시련에 당당하게 맞서는 지훈이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렸다(초등 5, 6년 용).
초등 고학년들이 두루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올해 나온 겨레아동문학선집(전 10권, 보리 발행)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1920년 초부터 50년까지 나온 동화를 연대순으로 묶은 이 책에는 방정환, 현 덕, 이원수, 마해송씨 등 동화작가를 비롯해 이태준, 정지용, 이 상, 백 석, 황순원씨 등 100여 명이 쓴 동화·동시가 함께 실려있다. 시대 현실과 그 안에서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좋은 글 속에서 만날 수 있다.
1∼8권은 동화이고, 9, 10권은 동시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아이들과 함께 동화를 읽자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내 아이가 책을 많이 있으면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따져보지 않고 부모들은 무조건 좋아한다. 읽지 않으면 책을 싸들고 다니며 읽으라고 닦달할 때도 많다.
책만 많이 읽으면 아이가 똑똑해지고, 대학 논술고사도 잘 치를 수 있고, 훌륭한 사람도 될 거라는 생각을 알게 모르게 한다.
책은 꼭 읽어야 하고 또 많이 읽으면 좋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억지로 책을 읽는 아이는 책에서 점점 멀어진다.
부모는 책을 들고 아이 뒤를 쫓아간다. 하지만 부모가 그 책이 좋다는, 그래서 아이들 삶에 도움을 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바심 내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다. 정말 좋은 책과 좋지 않은 책을 가리려면 어른이 먼저 아이들 책을 봐야 한다.
책 고르기는 어렵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정말 좋은 어린이 책이다.
동화작가 권정생씨의 「몽실언니」는 초등 3학년 정도부터 읽는 책이다. 거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몽실언니의 성장과 삶에는 우리의 현대사가 담겨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커가는 아이의 생활을 통해 작가는 현실의 갈등과 아픔, 작은 행복과 성취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책,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이룰만한 가치도 없는 일들을 로맨스로 가득 채워 그려내는 책은 나쁜 어린이 책이다.
어떤, 누구를 위한 행복인지도 없이 마냥 행복한 삶을 이야기하는 관념으로 가득 찬 동화도 불량식품과 같다.
어른들도 어릴 적을 보냈지만 요즘 아이들 삶을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같이 책을 읽다 보면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고 아이는 부모가 자기가 읽는 책을 보고 같이 이야기 한다는 것을 매우 즐거워한다.
그렇게 어른은 아이들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아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좋은 어린이 책을 읽다보면 어른이 되어 세상 살면서 든 나쁜 물이 조금씩 빠지는 듯 하다. 거짓으로 가득 찬 비뚤어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아이들 책을 읽어야 한다.
좋은 책도 골랐고 부모가 먼저 그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 책을 주어야 할까? 방법은 한 가지다.
「그냥 자연스럽게 놓아 둬라」. 아이가 손쉽게 책을 뽑아 읽을 수 있는 곳에 책을 두고 『아빠가 읽어봤더니 참 재미있더라』는 말만 하면 된다.
읽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책을 읽었는지 줄거리를 확인하고, 독후감 쓰기까지 강요하면 여태 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쉽다. 그냥 좋은 책이라고 넌지시 말해 주면 된다.
부모가 먼저 읽고 주는 책을 아이들이 마다할 까닭이 없다. 이렇게 아이들이 신나게 책 읽기에 빠지면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줬다고 할 수 있다.
어른과 아이 모두를 위해 아이와 함께 어린이 문학을 즐겨 읽기를 권한다.
/신임숙(경기 광명 「동화 읽는 어른 연합」 대표)
「동화 읽는 어른모임」은 93년 어린이도서연구회 지역모임으로 출발했다. 경기 광명, 시흥, 부평에 처음 생겨 지금은 전국 조직으로 커졌다. 지역마다 운영이 다르지만 대개 좋은 책을 골라 읽은 뒤 서로 이야기하고, 그 책을 주위에 소개하는 문화운동을 편다. 회원 가입은 어린이도서연구회(02-3672-4447)에 묻거나 연구회 인터넷 홈페이지(www.ibooknet.or.kr)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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