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콜 전독일총리는 지난해 9월 총선패배로 퇴진할 때까지 무려 16년간 집권한 전후 최장수 총리다. 원래 정략과 생존게임에 뛰어난 인물인데다, 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주변정세의 격동을 헤치고 통일위업을 일궈낸 것이 장기집권의 결정적 발판이 됐다. 타고난 풍모부터 키가 190㎝에 가깝고 몸무게는 100㎏을 훌쩍 넘는 거구지만, 초대 통일총리에 오르면서 독일역사에 우뚝선 정치적 거인이 됐다.■최근 이 거인의 위상에 가려졌던 음습한 그림자가 드러나 독일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다. 재임중 막대한 비자금을 집권당 안에서 주무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91년 군수업체가 사우디에 장갑차를 판 것과 관련해 100만마르크를 받는 등 수천만마르크의 비자금 조성의혹이 불거졌다. 프랑스기업에 옛 동독기업을 넘겨준 대가로 수천만달러를 받은 의혹이 프랑스쪽에서 폭로되는 등 추문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거인은 그림자도 크다」고 독일사회는 경악하고 있다.
■콜총리는 비자금을 통일과정 등에 썼을 뿐 사적으로 유용하진 않았다고 변명했지만, 「독일역사에 그림자를 남겼다」는 혹독한 비판이 쏟아졌다. 깨끗한 정치를 자부해온 국민의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때문이다. 정치자금의 큰 몫을 선거 득표수 등에 따른 국가 보조금으로 메워주는 대신 정당회계를 공인회계감사를 거쳐 공개토록 하는 등 엄격한 정치자금 규제를, 국민적 칭송을 받던 정치거인이 농락한데 따른 배신감은 엄청나다.
■콜은 헌법을 어겼다는 비난 속에 검찰수사와 정계은퇴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그가 던진 충격은 정당 회계감사를 연방 감사원에 맡기고, 유권자가 아닌 기업·단체의 기부금은 아예 없애자는 논의까지 낳고 있다. 거인 콜의 몰락은 어떤 큰 인물과 업적도 자신의 그림자에 묻힐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다. 독일에 어림없는 수준인 정치판 개혁을 외치면서도, 선거구조정 등 몸집불리기에만 몰두하는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돌아봐야할 교훈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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