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내 시의 한 순간 (36) 김영석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내 시의 한 순간 (36) 김영석

입력
1999.12.13 00:00
0 0

■내 시의 한 순간김영석 「나는 거기에 없었다」

이 세상에는 아주 셀 수 없이 많은 길이 있다. 산 속의 오솔길로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실로 이 세상에는 갖가지 모양새와 쓰임새의 길들이 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고 하늘에는 항로가 있다. 그뿐인가. 전화선도 전깃줄도 하나의 길이요 상품생산의 공정도 분명히 하나의 길이다.

그리고 온갖 영상과 소리를 주고받는 전파의 길도 있다. 이 모든 길들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이며,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 뜻에 따라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길들을 우리는 흔히 문명의 척도로 여긴다.

길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도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 짐승같이 사는 길, 의로운 길, 자기실현의 길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길들도 한번 생겨서 널리 유포되고 고속도로처럼 잘 닦여지면 밖에 있는 길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이 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이 길들도 이미 밖에 있는 길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길들도 우리는 역시 발전된 문화 또는 문명의 척도로 여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발전된 문명 속에서 아주 편리하고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잘 닦여진 길들이 얼마든지 밖에 있으므로 이것저것 골라서 사용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조립식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말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내면 또는 참된 생명의 터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레고 게임일 뿐이고 길에 갇혀있는 것일 뿐이다. 사람답게 사는 길은 나의 안으로부터 비롯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나의 안으로부터 비롯되는 길을 찾으려면 이미 있는 길로부터 벗어나거나 그 길을 지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길 밖에 무수한 길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의 시집 「나는 거기에 없었다」(시와시학사 발행)는 이러한 길을 찾는 길, 길을 지우는 길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는데, 길을 묻는 이에게 나는 이제 이 시집의 「길」 이라는 짧은 시를 들려주고 싶다.

「길은 없다/그래서 꽃은 길 위에서 피지 않고/참된 나그네는/저물녘 길을 묻지 않는다」. /시인·배재대교수·시집 「썩지 않는 슬픔」, 논저 「도의 시학」 「한국 현대시의 논리」등·제4회 시와시학상 수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