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은 절대 죽지 않는다(네버다이). 아니 끝이 없다(언리미티드).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가 끝나고, 중동의 테러집단이 잠잠해도 제임스 본드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날 수 없다. 낙원이 아닌 지구촌에서 그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아직도 너무나 많다. 아마 새로운 천년에도 그것은 유효하리라. 세기말의 007시리즈 「언리미티드」(19번째)는 이를 주장하듯 원제를 「The World Is Not Enough(세계는 충분하지 않아)」로 달았다.충분하지 않은 것은 석유이다. 여전히 인류에게는 주 에너지원이 되고 있는 석유의 절대량이 점점 부족한 상황에서 중동의 송유시설을 독점하려는 음모가 진행된다. 우리의 영웅 제임스 본드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곧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곳곳에 위기일발이 숨어있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관객들은 느긋히 그 스릴과 화려한 액션과 테크놀로지를 즐기면 된다. 007시리즈의 가장 큰 무기는 지역과 액션과 인간적 매력의 3가지 볼거리이니까.
「언리미티드」(감독 마이클 앱티드)는 다른 작품에 비해 화려하다. 정교한 테크놀로지와 촬영기술을 이용한 육,해,공에서의 다양하고 큰 액션이 쉬지않고 펼쳐진다. 템즈강에서는 보트로 범인을 추격하고, 알프스 설원에서는 악녀 본드 걸인 일렉트라(소피 마르소)와 스키곡예를 펼친다. 핵폭탄을 찾기 위해 중동을 가로지르는 빈 송유관 속을 썰매타듯 달리고, 이스탄불의 작은 섬을 찾아 해저에 폐쇄된 핵잠수함에 뛰어든다. 이를 위해 수·륙겸용 자동차를 개발했고, 거대한 체인톱을 장착한 헬기가 등장해 집과 자동차를 두동강 낸다.
사건이 단순한 만큼 구성과 인물심리의 이중성으로 흥미를 높이려 했다. 살해된 석유재벌과 테러범 르나드(로버트 칼라일)에 납치됐다 풀려난 그의 딸 일렉트라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 스토킹 신드롬에 걸려 일렉트라를 사랑하게 된 르나드,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음모를 성공시키려는 일렉트라. 그녀의 이중연기에 속는 본드. 숀 코너리의 노련함과 낭만적 분위기, 로저 무어의 섹시함 대신 피어스 브로스넌에게는 소박하고 친근한 인간의 체취와 숨소리가 있다.
사랑의 감정에 갈등을 겪기도 하고, 악녀 일렉트라에게 그 감정을 오히려 역이용당하기도 한다. 그의 여성편력을 혐오하던 상관 M(주디 덴치)도 바뀌었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강단은 여전하지만 더이상 M은 남성혐오증을 보이지는 않는다.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악당들의 극단적이고 단세포적인 행동. 그렇더라도 악녀(본드걸)역을 맡은 소피 마르소가 오랜만에 배우로 보이는 것이 반갑다.
18일 개봉. 오락성★★★★ 예술성★★★ (5개 만점, ☆은 1/2, 한국일보문화부 평가)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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