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은 핵심을 비껴갔다. 무수한 규제와 제도가 도입됐고 총수들로부터 개혁동참의 각서까지 받았음에도, 재벌체제에 근본적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지난 2년의 구조개혁처방이 맥을 잘못 짚어왔음을 암시해준다.겉도는 재벌개혁의 해법으로 전문가들은 단연 「산업-금융의 분리」를 꼽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준경(金俊經)연구위원은 『재벌체제의 버팀목인 금융지배만 차단한다면 구조개혁은 절반이상 성공한 셈이다』고 말했다.
금융은 재벌구조의 「급소」다. 재벌에서 금융을 떼어낸다면, 그래서 금융기관이 채권자·기관투자가 본연의 감시자로 자리잡는다면 더이상 무차별 확장도, 황제경영(총수전횡)도 불가능해진다. 엄정한 사외이사도, 기세높은 소액주주도, 까다로운 결합재무제표도 산업_금융의 분리보다 강력할 수는 없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사이에 방화벽(Firewall)을 치는 것은 선진국에선 오래전부터 제도·관행화 있는, 그 자체가 「글로벌 스탠더드」다.
그러나 사외이사 확대, 계열사 지원한도축소 등 정부가 내놓은 사금고화(私金庫化) 방지장치들은 너무 말랑말랑하다. 이미 제2금융권의 시장규모가 은행권을 압도(7대3)한 상황에서, 재벌의 은행소유만 금지하고 제2금융권 지배는 용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완전 분리를 늦출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투명성은 개혁의 전제조건이다. 좌승희(左承喜)한국경제연구원장은 『죄가 있으면 누구라도 처벌받아야 하지만 일상적 행정·사법행위인 세무조사나 검찰수사가 재벌정책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며 『정부의 법집행과 제도운영에 어떤 경우든 자의성이 개입되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공포」로 재벌을 통제할 수는 있어도 결코 개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실효성없는 제재는 「현실화」해야 한다. 금년에만 세차례나 5대재벌 내부거래조사를 벌여 수천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는데도 변칙지원이 근절되지 않는 것, 엉터리 회계에 대한 중징계방침에도 불구하고 분식결산이 횡행하고 있는 것은 결국 제재가 「솜방망이」에 불과하다는 증거다.
21세기에도 대기업은 필요하고, 대주주의 역할은 크다. 그러나 재벌과 황제총수는 압축성장의 종말과 함께 소임도 끝났다. 재벌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재벌개혁 이제시작 (5·끝)
-금융계열사 완전분리후 은행소유 인센티브부여
-과다부채비율, 내부거래적발 재벌 소유불허
-자본금 확충의무화로 소유분산유도등
재벌개혁은 「병목상태」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2년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어온 세부개혁 과제들은 이제 어떤 형태로든 우선순위설정과 전략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핵심은 산업재벌의 금융결별 재벌의 금융소유는 편집증에 가깝다. 자동차 반도체를 포기할 망정, 부실해도 금융계열사는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한 은행임원은 『그들은 금융이 없으면 그룹 전체가 쓰러진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시장경제에서 산업에 대한 감시는 정부 아닌 금융의 몫이다. 견제받아야 할 금융을 되레 소유한 덕에 오너는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고, 문어발 팽창을 할 수 있었다. 산업-금융의 고리가 단절된다면 황제경영(총수전횡), 고무줄회계(회계 불투명), 백화점식 경영(문어발확장), 과다차입(차입경영)등 재벌의 폐악은 대부분 해소될 수 있다.
▦어떻게 결별시킬까 관건은 재벌의 앞마당이 된 제2금융권이다. 가장 확실한 분리수단은 은행(동일인지분한도 4%)처럼 제2금융권도 지분상한선을 설정, 재벌들에게 금융계열사 보유주식을 강제매각토록하는 것이지만 이같은 「맥아더식」접근은 상당한 저항과 위헌논란을 빚을 수도 있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영철(朴英哲)고려대교수는 『재벌이 금융계열사를 완전 분가시킬 경우 분가금융사에 정부소유 은행을 넘겨주는 인센티브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현대그룹에서 증권·투신·보험등 전 금융계열사가 계열분리돼 「현대금융그룹」이 만들어지면 한빛·서울·조흥은행등 국영화한 은행의 정부지분을 금융그룹에 매각, 은행소유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산업-금융자본의 완전분리와 선진국형 금융전업그룹의 탄생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금융기관을 소유할 수 있는 재벌요건을 아주 까다롭게 하자는 주장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준경(金俊經)연구위원은 『결합재무제표 기준으로 부채비율이 높거나, 계열금융사를 통해 부당내부거래를 한 재벌은 정부가 금융계열사 지분을 강제매각토록 명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상조(金相祖)한성대교수는 『은행 자기자본비율처럼 제2금융권도 자산이 아닌 자본금으로 건전성 여부를 감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산규모 40조원의 삼성생명의 경우 자본금은 1,000억원 안팎에 불과, 결국 대주주는 1,000억원으로 40조원의 돈줄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보험·증권·투신사도 자본금 확충을 의무화, 증자를 통해 소유분산을 유도하자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사외이사와 감사의 수를 늘리고, 소액주주권을 확대하는 식의 현행 금융지배 억제정책으론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다는 점이다.
▦산업-금융 분리 다음은 한 재계인사는 『지나고 생각해보면 올해초 빅딜의 성과내기에 매달려 침몰 초읽기에 들어간 대우에 삼성자동차를 인수시키려고 했던 정부의 발상 자체가 난센스였다』고 말했다. 아무리 재벌의 족벌체제가 잘못됐어도, 순수 민간단체인 전경련회장 선출에 정부가 「아무개는 안된다」는 식의 암묵적 비토권을 행사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시적 결과만을 위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고, 임의적 잣대가 개입된다면 그 어떤 제도로도 개혁은 뒷걸음칠 수 밖에 없다. 개혁은 「정치적 전리품」이 아니다.
재벌개혁은 21세기 한국경제의 운명이다. 누구도 거역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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