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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문학상 현기영씨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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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문학상 현기영씨 수상소감

입력
1999.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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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로 모자라는 제가 32년이라는 긴 연륜을 자랑하는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의 반열에 오른 것은 정말 뜻밖의 행운입니다. 역대 수상자들의 수상 당시의 면면을 보면 대개 젊은 작가들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상이란 그와 같이 젊은 작가들을 칭찬함으로써 한국문학의 풍요로운 미래에 이바지하는데 가장 큰 뜻이 있을 텐데, 나이 많은 저에게까지 수상의 차례가 오다니, 아직도 얼떨떨한 심정입니다. 결코 젊지 않은 저에게 이 상을 준다는 것은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저처럼 연만한 작가들 모두에게 문학적으로 젊어지라는 격려의 뜻이 담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심사위원님들께서 저의 이번 작품이 젊게 느껴졌노라고 과찬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실 저는 이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내내 나이보다 훨씬 젊어진듯한 기분 속에서 지냈습니다. 성장소설인 이 작품을 쓴다는 것은 저의 내면에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유년, 소년의 모습을 되살리는 일이었으므로, 저 자신이 그 시절의 그 아이로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마치 그 시절을 다시 한번 사는 것처럼 마음의 젊음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현재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 소비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과거라는 시간이 문득문득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저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몸을 떨곤 했습니다. 그래요, 과거는 소비되어 없어진 게 아니라, 무의식의 지층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저는 자주 고향을 방문해 옛 자취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다니곤 했습니다. 내가 살던 마을은 시가지의 한 귀퉁이가 되어버렸지만 그 아래로 펼쳐진 해변 풍경에는 아직도 옛것들이 남아 있어서 과거를 떠올리는 작업에 좋은 불쏘시개가 되어 주었습니다.

한내의 냇가 우거진 풀숲 속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는 옛 오솔길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이라니요! 그 마을 아이들은 이제 자연보다 인공환경을 더 좋아하는 도시 아이들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바다에 수영하러 다니던 그 오솔길은 풀숲 속에 묻혀 잊혀지고 만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한 분자로서 성장하는 그런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한성장, 무한질주의 신화에 사로잡힌 요즘 사람들에게 과거란 가난과 누추의 다른 말이며, 그래서 폐기처분해야 할 부정적 대상으로만 존재합니다.

제가 이 작품을 쓰면서 되찾아낸 시간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요, 과거는 가난하고 누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난은 극복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필요를 훨씬 능가해버린, 열 배 스무 배 능가해버린 소비향락문화는 우리의 영혼을 황폐화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고향, 인류의 뿌리를 거기에 두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삶, 그리고 인류가 걸어온 과거라는 시간의 맥락에서 단절된 삶이란 자신의 모태를 부정한 왜곡된 삶이 틀림없습니다. 역사상 지금처럼 과거와의 단절이 깊었던 적은 없습니다. 과거의 가치들이 부정되거나 아니면 오락화, 키치화(통속화)되어버리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적대적 상황은 21세기 한국문학이 새롭게 거듭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고, 과거를 거울삼아 새로움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문학 말입니다.

이 상을 마련해주신 한국일보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는 지금, 진지한 문학을 애호하고 지지하는 이 상의 의미는 그래서 더욱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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