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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스포츠20대사건] (4) 김일과 프로레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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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스포츠20대사건] (4) 김일과 프로레스링

입력
1999.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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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70년대 최고의 인기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마을에 몇대 보급도 되지 않은 TV에 반상회하듯 어른, 아이할 것없이 옹기종기 모여앉았고 별다른 유희가 없었던 남자아이들은 방바닥에서 레슬링을 흉내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그들의 우상은 김일이었다. 김일은 언제나 초반 상대편의 반칙에 당하지만 막판에 무소뿔같은 박치기로 잔악무도한 반칙을 일삼는 상대편을 일거에 거꾸러뜨리는 권선징악 스토리를 구현했다. 힘없는 서민의 막힌 속을 뚫어주는 듯한 통쾌함이 있었고 대상이 주로 일본레슬러였기에 극일과 애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에 한국출신의 역도산이 미국레슬러를 데려와 일본인들의 속을 풀어주며 레슬링을 중흥시켰고 그 애제자인 김일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켰다. 전남 고흥출신의 김일은 50년대초 도일, 프로레슬링 최고스타 역도산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라는 이름으로 일본프로무대에 데뷔했다.

6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 태그챔피언으로 등극하며 그의 이름을 알렸고 65년 귀국, 이때부터 각종 국내외타이틀매치를 벌이며 국민영웅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파인 장영철이 김일과의 대립끝에 67년 『프로레슬링은 쇼다』는 충격적인 폭로로 파문이 일었지만 70년대 중반 김일은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등 일본프로레슬링 간판스타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세계타이틀전을 가지며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흑백TV시대로 불리는 이때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다방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거리가 썰렁해질 정도로 레슬링은 최고인기의 스포츠였고 김일은 슈퍼스타였다.

폭발적 인기와 관심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프로야구의 등장으로 촉발된 축구 씨름 등 대중스포츠들이 프로화로 관심을 끄는 사이 김일을 이을만한 걸출한 후계자를 만들지 못한 프로레슬링은 쇠퇴일로를 걸었다.

환갑을 눈앞에 둔 김일은 84년 붐조성을 위해 링에 오르며 영광을 돌이켜보려 했지만 흐름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일은 프로레슬링의 쇠퇴와 함께 사업가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았던 가운데 80년대 중반이후 대중의 관심밖으로 물러났다. 그가 대중의 관심을 다시 끈 것은 91년.

30여년에 걸친 무수한 박치기때문인지 그는 고혈압과 심부전증 등 병마와 싸우며 휠체어에 의지한 박치기왕으로 91년 다시 대중앞에 나타났다. 고독한 투병생활을 하는 박치기왕의 모습은 국회의원으로 은퇴이후마저 스타생활을 하는 라이벌 이노키와 대비돼 국민적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김일은 노원 을지병원 박준영이사장(41)의 도움으로 94년 이후 을지병원 7211호에 입원, 치료와 재활을 겸하며 병세가 많이 호전됐고 때때로 프로레슬링 지방대회에 격려차 참석하는 등 노년을 보내고 있다. 김일은 기자에게 『후배들이나마 잘됐으면…』하고 척박한 프로레슬링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후배들을 걱정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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