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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 할머니 '황혼 이혼'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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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 할머니 '황혼 이혼' 불허

입력
199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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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남편 순종강요 이혼사유 안돼" ...여성단체 반발이혼을 판정하는 잣대는 과연 무엇인가.

대법원과 여성단체들이 요즘 새로운 사회현상인 「황혼이혼」 문제를 놓고

서로의 분명한 시각차를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

대법원은 8일 A(76·여)씨가 남편(84)을 상대로 낸 이혼소송 상고심에서 할머니의 이혼요구가 적절치 않다며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부부의 연령과 혼인기간, 혼인 당시의 가치기준과 남녀관계 등을 참작하는 것이 가부장적 남존여비 관념으로 이혼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며 기각했다. 대법원은 특히 『할머니는 고령으로 인해 장애를 겪고 있는 남편을 돌 볼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의 이같은 판결에 대해 여성계와 시민단체들은 『하루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은 할머니의 하소연을 법원이 외면한 것은 가부장적 선입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여성단체들은 특히 시대의 추세는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어야 하고 이를 존중하는 것이라며 대법원은 결혼 당시 사회의 가치관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A씨가 중학교 교사였던 B씨를 만나 결혼한 것은 지난 46년. 남편은 이미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고 재혼한 뒤 다시 1남3녀를 뒀다.

A씨에 따르면 남편은 재산이 있으면서도 최소한의 생계비만 주며 가부장적 태도로 A씨를 억눌렀다. 욕설과 폭행도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전처의 아들과 불륜을 저질렀다며 A씨를 의심까지 했다. 참다 못한 A씨는 97년 5,000여만원을 들고 큰 딸 집으로 피신했고 이에대해 남편은 A씨를 절도 혐의로 고소, 혼인은 파탄을 맞았다.

결국 A씨는 97년 이혼소송을 냈고 지난해 6월 위자료와 재산분할 7억여원에 대한 승소판결을 받아 냈다. 그러나 항소심은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는 혼인당시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혼인을 파탄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며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A씨는 『50여년전의 가치기준으로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같은 논란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대법원은 황혼이혼에 대해 보수적으로 결정했으며 여성단체들은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혼문제에 접근했다』며 『현재 우리사회에 혼재되어 있는 보수와 진보의 가치관이 축소된 것 같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황혼이혼] 여성단체 " 가치관변화 무시"

▲A씨측 입장=헌법소원을 내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 이번 판결은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재판부가 스스로 내팽개치고 가부장적 남성집단의 입장만을 대변한 행위이다.

노령이라는 이유가 어떻게 상식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가치에 비추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서울고법은 지난 8월 또다른 황혼이혼 소송건과 관련, 「평생을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가정을 이끌어온 피고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대법원은 당시의 가치기준에 비추어 봉건성이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남편 입장=젊어서부터 가족만을 위해 열심히 일해왔다. 최소한의 생계비만 주며 학대했다고 주장하지만 몸에 밴 근검절약을 실천한 것이다.

결국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A씨측이 주장하는 폭행도 증거가 없다. 오히려 A씨측이 여성단체들과 연계해 일방적인 여론몰이를 펴고 있다. 자녀들도 편이 나뉘어 싸우는 마당에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A씨의 불륜사실도 알고 있지만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부각시키지 않으려했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나이가 들어 병마와 싸우는 남편을 버리겠다는 A씨의 입장은 여성인권등의 이름으로 합리화되어서는 안된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오순옥(吳淳玉)부장=이번 판결은 남성위주의 가치기준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가치기준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혼 당시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판결기준으로 삼은 것도 납득할 수 없다.

▲한국여성민우회 유경희(柳京嬉)사무국장=놀랍고 당황스러운 판결이다. 오죽했으면 고령의 나이에 소송을 내고 헤어지려고 했겠느냐.

남은 생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려는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법원이 막아버렸다.

▲참여연대 하승수(河昇秀)변호사=이혼불가 판결이 나더라도 정상적인 동거생활을 꾸려갈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법원이 고려했어야 했다.

황혼이혼의 원인은 가족해체나 현대사회의 병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복 추구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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