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 이제시작 (4)투명한 기업회계 여전히 요원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 조달, 재무제표에 안 나타나다.
"한국기업의 재무제표는 믿을 수 없다"
『한국의 재벌들은 비밀회계장부를 만드는데 탁월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회계의 투명성만 확보된다면 한국기업의 주가는 지금보다 20-30% 높아질 것이다』라는 것이 외국인투자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30대그룹은 5공시절 전두환(全斗煥)대통령에게 2,259억원, 6공시절 노태우(盧泰愚)대통령에게 2,838억원의 자금을 제공했다. 그러나 해당 기업의 재무제표 어디를 들여다 봐도 비자금 조성의 흔적이 없다. 재무제표가 엉터리라는 지적이다. 국세청은 최근 한진그룹 세무조사결과를 발표, 96~98년 3년동안 대한항공 등 4개 계열사가 무려 1조895억원의 소득을 탈루했다고 밝혔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재무제표를 어떻게 짜맞추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이 쓰러질 때마다 튀어나오는 문제의 하나가 분식결산이다. 실제로는 손실을 봤으면서도 대규모 이익이 난 것으로 재무제표를 발표했다. 투자자들을 속인 것이다. 주요기업의 분식규모는 기아자동차 3조148억원(97년) 아시아자동차 1조5,600억원(97년) 한보철강 668억원(95년) 도합 2,718억원(98년) 등이다.
투자자들의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그러면 다른 기업은 재무제표를 제대로 작성하고 있는가』이다. 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분식결산이 「한국적 회계」의 뿌리깊은 관행이라면 다른 기업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분식회계를 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어느 누구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한 회계사는 『정부당국에서 밝혀낸 비자금이나 탈루소득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며 『외국투자자들은 한국의 재무제표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재무제표는 기업경영의 「성적표」다. 분식회계는 수험생이 자신의 성적표를 조작하는 것과 같다. 회계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는 한 재벌개혁은 공염불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비용·수입 부풀리고 빚은 줄여 회계조작
『회장님, 올해 당기순이익은 얼마로 할까요?』
대기업 계열사 경리담당 L이사는 해마다 이맘 때면 어김없이 핵심부원들과 모임을 갖는다. 연말결산때 확정할 당기순이익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회장님」의 인가를 받아 금액이 확정되면 연말 재고와 비용전표를 조작, 외부용 당기순이익을 「생산」해 낸다. 내년초에는 외자를 유치할 계획이기 때문에 올해는 「특별 제작」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기업들은 자칫 「연말 농사」를 그르치면 이듬해 사업전망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금융기관에서 대출이 차단되는 것은 물론 주가도 바닥을 칠 것이 분명하다. 한 대기업 경리담당 임원은 『투명한 회계처리로 큰폭의 적자를 내면 금융기관의 대접이 달라지는 현실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항변한다.
■대기업 회계조작 사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기아자동차는 전산기록장부를 조작, 91-97년 각종 비용과 가짜 할부수익 등 2조799억원을 매출로 허위계상해 수입을 부풀리고 빚을 줄였다. 특히 97년에는 당기순손실을 3조3,977억원에서 3,829억원으로 3조원 넘게 줄여 「건전한 회사」로 눈속임했다.
한보는 비용을 부풀리는 방식을 적극 활용했다. ㈜한보는 철강공사계약을 일괄도급 받으면서 노무비 7,332억원을 유용했고 건설자금이자와 시험운전비도 각각 4,344억원과 1,232억원씩 과다계상했다.
장부보다 무려 40조원이 부실자산으로 드러난 대우는 실사회계법인에서 분식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대우와 계열사간 장부상 채권-채무의 불일치액이 최소 수조원에 달한다는 것이 삼일회계법인의 설명이다. 특히 동일한 거래에 대해서도 계열사간에 채권-채무금액이 차이가 나는 경우까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대우를 통해 해외 현지법인이 판매한 자동차 수출대금이 다시 대우차로 입금되지 않고 ㈜대우의 현지법인 광고비로 사용된 사례도 드러났다.
■나머지 재벌들은 투명할까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터진 95년말-96년초. 외국 투자자들은 두 전직 대통령보다 오히려 자금을 제공한 재벌에 대해 더 경악했다. 30대 대기업 중 비자금 조성에 한 몫 거들지 않은 기업은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 『도대체 회계처리를 어떻게 하길래 그 엄청난 자금을 자유자재로 빼돌릴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한보·기아를 비롯해 해태, 진로, 고합, 벽산 등 쓰러진 대기업들에 대한 감독당국의 「해부」과정에서는 어김없이 회계조작 사례가 적발됐다. 「살아있는 재벌」도 예외가 아닐 거라는 「의혹」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 미국 공인회계사(CPA)는 『감독당국이 「4대 재벌」에 대해 조사를 벌인다 하더라도 규모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분식결산을 하지 않은 계열사가 없을 것』이라며 『결국 모든 재벌기업은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화약고를 품고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장하성(張夏成)고려대 교수는 『회계주체들의 혁신적인 사고전환 없이 재벌개혁은 불가능하다』며 『1년여가 넘도록 재벌의 반대에 부딪쳐 국회에 계류중인 집단소송제의 신속한 도입으로 개인에 대한 사후보상체계를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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