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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노을 속의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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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노을 속의 적멸보궁

입력
199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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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보내고 맞는 의식이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화려함만큼 분명 번잡하고 소란스러울 것이다. 깊이 침잠하며 새 천년의 소망을 빌만한 곳은 없을까. 산사, 그 중에서도 적멸(寂滅)의 성전인 적멸보궁은 어떨까. 적멸이란 열반(涅槃·Nirvana)을 뜻하는 말로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일컫는다. 한반도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 모두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7세기에 창건했다. 그가 직접 중국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사리와 가사(옷)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사리를 모신 곳이어서 불상이 없다. 대신 수미단(불단)에는 빈 방석만이 놓여있다. 천년이 지는 노을 속에서 천년이 넘게 비어있는 수미단의 뜻을 헤아려보는 여행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태백산 정암사(강원 정선군 고한읍)

정선군의 사북과 고한은 탄광촌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이슬이나 탄가루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찌그러진 판자촌, 폐광의 쇳물이 흘러 벌겋게 녹이 슨 바위 계곡, 탄좌와 탄차가 뿜어내는 요란한 기계소리…. 정암사는 그 탁한 기운의 한 가운데에 연꽃처럼 오롯하게 피어있다. 대찰은 아니지만 포근한 분위기와 추상같은 절도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위엄있는 절이다. 산업화의 회오리 속에서 이 지역에 사는 막장 인생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왔다.

탄허스님이 현판을 쓴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육화정사, 정면에 범종각이 서있고 범종각 너머 적멸궁이 눈에 들어온다. 적멸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적멸궁은 고색창연하고 아름답다. 단청은 색이 바래고 기둥과 서까레는 잘게 갈라졌다. 지붕에만 반짝이는 청기와를 얹고 있다. 잘 정돈된 돌담과 뜰 안에 좌정한 적멸궁의 풍체는 예술적 외경심마저 불러 일으킨다. 적멸궁 뒤 언덕에는 사리를 모신 수마노탑(보물 제410호)이 있다. 석회암 벽돌을 채곡채곡 쌓아올렸고 상단부를 청동으로 얹은 7층모전탑(벽돌로 쌓은 탑)이다. 탑으로 가려면 적멸보궁을 나와 계단으로 산길을 100여㎙쯤 올라가야 한다.

강원도 산골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중에 있지만 이제는 절 앞까지 대로(414번 지방국도)가 뚫려 누구나 쉽게 참배할 수 있다. 정선과 태백을 연결하는 38번 국도를 이용하거나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태백선 열차로 고한까지 간 뒤, 만항행 버스를 타면 된다. 정암사의 밑으로는 국내 철도 터널중 가장 긴 정암터널이 지나고 있다.

■영취산 통도사(경남 양산군 하북면)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를 3보 사찰이라 부른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法寶), 송광사는 수많은 대승을 배출해 승보(僧寶),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는 것이다. 3보 중 으뜸은 당연히 불교의 근본인 부처를 모신 불보, 통도사이다. 자장율사가 사리를 가장 먼저 봉안한 곳이 바로 통도사이다. 일주문 기둥에 「불교의 종가집(佛之宗家)」라고 쓰여진 것도 이런 까닭이다.

통도사는 우선 진입로가 운치가 있다. 냇물이 흐르는 길 한켠으로 사지를 비튼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냇물 건너편으로 일주문을 우회해 절 바로 옆에까지 이르는 주차장이 있지만 가능한 한 절에서 먼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걷는 것이 좋다.

일주문과 금강문, 불이문을 차례로 지나면 좌우로 품위있는 모습의 건물과 탑이 줄을 잇는다. 적멸보궁은 정면에 서 있다. 사방으로 적멸보궁, 대웅전, 대방광전,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금강계단 글씨와 일주문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역시 불상이 없다. 빈 불단 뒤로 창이 넓게 나 있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보인다.

적멸보궁 옆에는 구룡신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통도사의 터는 원래 큰 호수였고 옛날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절을 짓느라 호수를 메우면서 여덟마리의 용이 쫓겨가고 한 마리만이 절을 지키며 남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는 신비의 연못이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IC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이다.

■오대산 적멸보궁(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 아래 천혜의 터가 있다. 적멸보궁은 그 아름다운 터에 바람을 맞으며 서있다.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이 곳의 모양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이라고 극찬한다. 연봉이 주위를 호위하고 앞은 거칠 것 없이 툭 터졌다. 「이 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덕에 우리나라 스님들은 먹을 것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오대산 적멸보궁행은 월정사부터 시작된다. 강원도의 모든 사찰을 통괄하는 대찰 월정사는 절 앞까지 아스팔트로 포장돼있다.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등이 월정사의 명예를 대표하는 보물들이다. 월정사에서 비포장길로 8㎞를 오르면 상원사가 나온다. 적멸보궁을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상원사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청량선원, 문수동자상, 동종(국보 제36호)등으로 유명하다. 적멸보궁은 상원사에서도 2㎞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은 70%가 계단이다. 가파른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짧은 거리이지만 땀을 쏙 뺀다. 중간 지점에 스님들이 수행하는 중대선원이 있는데 요즘 중창공사로 간이 모노레일까지 설치됐다. 봉분처럼 생긴 언덕 위에 자리한 적멸보궁은 화려하지 않고 단아하다. 댓돌에는 언제나 서너켤레의 신발이 놓여있고 불자들의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영동고속도로 하진부IC에서 빠져 주문진으로 가는 6번국도를 타면 월정사입구에 닿는다.

■사자산 법흥사(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사는 불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이 문을 열고 위세를 떨쳤던 사찰이다. 그러나 규모는 그 위세를 느끼기 힘들 정도로 작다. 출입로는 시멘트포장과 비포장이 뒤섞인 조악한 도로이고, 덩그렇게 주차장만 넓을 뿐 평일에는 한산한 모습이다. 법흥사는 1912년 산불로 소실됐고, 17년의 중건불사를 마치자마자 1931년에는 산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39년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비교적 최근에 다시 옛모습을 회복해가고 있다. 요즘도 불사가 한창이다.

최근에 중수된 적멸보궁이어서인지 5대 적멸보궁중 가장 화려한 단청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운치는 떨어진다. 현판을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는 용머리 장식이나 뜰에 서있는 한쌍의 석등도 아직 세월의 맛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적멸보궁 뒤로는 자장율사가 기도하던 토굴이 있고 그 옆에 사리를 넣어왔다는 석함이 남아있다.

법흥사에서 또 볼만한 것은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탑비. 탑과 나란히 극락전이 세워져 있다. 사자산 자락으로 저녁해가 넘어갈 때, 겨울숲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서 있는 극락전은 정갈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설악산 봉정암(강원 인제군 북면)

5대 적멸보궁중 일반인의 참례가 가장 어렵다. 설악산 소청봉의 거의 꼭대기인 해발 1,244㎙의 험한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은 오랫동안 불자들 보다는 등산객들의 차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산을 좋아하는 불자라면 등산과 참례의 두가지 기쁨을 한꺼번에 맛 볼 수 있다.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은 백담계곡에서 시작된다. 백담사 입구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는 걸어서 약1시간30분. 중간지점까지 셔틀버스가 다니고 신도용 버스가 백담사까지 부정기적으로 운행하지만 계곡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걷는 것이 좋다.

봉정암은 백담사에서 다시 6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발걸음마다 절경과 만나는 기쁨이 있지만 마지막 1시간은 등산 전문가들도 힘들어하는 코스, 일명 「깔딱고개」이다. 자장율사는 왜 이렇게 힘든 곳에 적멸보궁을 지었을까? 힘든 끝에 짜증도 나지만 보궁에 다다르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봉정암은 5대적멸보궁은 물론 이 땅의 산사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고통스런 수행 뒤에 얻는 득도의 기쁨. 봉정암 적멸보궁은 간단하게 그 진리를 일러준다.

15일까지 산불예방 차원에서 입산을 금지하고 있다. 서울에서 홍천-인제를 거쳐 미시령으로 향하는 46번 국도를 따라가면 백담사입구가 있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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