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로부터 기타를 선물로 받았다. 기타는 마음의 안정을 찾게하고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공부를 하면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기타 연습을 하면서 밤을 하얗게 지새운 적은 가끔 있었다.인하대 1학년 때의 일이다. 77년이니까 박정희 정권 말기의 암울한 시절이었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축제기간에 연주를 하곤했는데 그해말 이화여대 졸업생 환송회 공연에 출연한 뒤 『올해가 가기 전 서울의 큰 무대에서 공연 한번 해보자』고 결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준비에 매달렸다. 하지만 공연장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또 지도교수는 『공부도 못하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무슨 공연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게다가 그때는 공연 허가를 받기위해 연주할 곡까지 승인을 얻어야하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급기야 총장 자택을 밤늦게 찾아가 눈물로 호소하고, 시험을 포기하면서까지 총장님, 지도교수와 마라톤 회의를 열어 결국 허가를 받아냈다. 공연이 불과 3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우리는 공연 준비에서 티켓 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말 극적으로 하나 하나를 해결해나갔다.
77년12월10일 문화체육관. 전국대학배구대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큰 무대를 얻기는 했지만 사람을 채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마 대학 보컬그룹이 문화체육관에서 단독 공연을 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오후3시와 6시. 2회 공연에 좌석은 4,000석. 별다른 홍보 방법이 없었던 우리로서는 객석을 채운다는 게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체육관 앞이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암표가 팔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연습과 긴장감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연을 끝낸 우리에게 지도교수는 『내가 너무 염려한 것 같군. 수고했네』라며 머쓱해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을 다 휘어잡은 희열을 느꼈다. 그래, 우리는 해냈다. 세상에 태어나 몸무게가 8㎏이나 준 것은 그때뿐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열정과 희열은 이후 내가 하는 어떤 일에도 성공의 잣대가 되어 내가 맡고있는 분야에서 그런 열정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게 된다. 젊었을 때 무언가에 미쳐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하진·한글과 컴퓨터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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