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1898-1959·사진)이라면 한국인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부산 동래구에서는 기념관을 만들어 두 달 전 개관했다(홈 페이지 cyber.tongnae.pusan.kr). 그만큼 유명한 농학자, 유전학자 우장춘이 우리 역사의 비극적 주인공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장춘하면 「씨없는 수박」을 먼저 기억한다. 물론 페튜니어꽃 새 종자 개발이 대표적 업적이고 나아가 광복직후 불모지같던 이 땅에 새 농작물 육종 개발의 공을 남겼다.그런 그가 구한말 역적 우범선(1857-1903)의 아들인 것이다. 1895년 을미사변의 제2대 대장이었던 우범선은 이듬해 일본에 망명하여 일본 여성과 결혼, 우장춘을 낳았다. 다시 2년 뒤 임신중이던 아내와 장춘을 남긴 채 우범선은 조선 자객 고영근에게 살해당했다. 고아원을 떠돌면서도 성적은 좋았던 우장춘은 조선총독부 장학금으로 동경제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원하던 공과가 아니라 농과를 공부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1919년 일본 농사시험장에 취직했고 1936년에는 종의 합성으로 동경제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20년 근무지에서 그는 해고됐다. 창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어논문을 보면 「우 나가하루」라고 성은 지킨 채 이름만 일본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우장춘은 광복이 되자 일본인 아내와 2남4녀를 뒤로한 채 1950년 3월8일 부산으로 귀국한다. 59년 8월10일 사망할 때까지 그는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큰 딸 결혼에도, 어머니의 사망에도 그는 일본에 갈 수 없었다. 출국허가를 얻지도 못했다.
그는 우리말도 거의 못하면서 왜 50을 넘긴 나이에 안정된 일본을 떠나 한국에 돌아왔을까? 그의 일생을 책으로 쓴 일본 여성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는 책 제목을 「나의 조국」이라 붙였다. 우장춘의 귀국은 『쌓이고 쌓인 일본에 대한 혐오감』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럴지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 조국에 대한 속죄의 감정이 있었을 법하다. 또 한국에서 더 큰 과학자로 평가받을 것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우장춘이란 이름이 그렇게 유명한 이 땅에서는 그의 일생을 정리한 책 한권 없다. 일본인이 쓴 전기가 번역됐을 따름이다. 이것이 더 안타까운 우장춘의 그늘인가. 박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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