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을 앞두고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그 무렵, 장기간 결근끝에 그 선생님은 오랜만에 학교에 나왔다. 빡빡 깎은 민머리에 초췌한 몰골로 다시 교단에 선 선생님한테서 지난날의 그 젊고 패기에 넘치던 모습은 당최 찾아볼 수 없었다.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인공 치하에서 부역 행위를 했다는 등, 병역 문제로 숨어 지냈다는 등 출처불명의 소문만이 막연하게 떠돌 따름이었다.
시작 종이 울렸는데도 한동안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던 선생님이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좋은 나라가 어느 나란지 아느냐.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자신있게 대답했다. 미국이요. 당시의 우리로서는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쓴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우리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유엔 참전 16개국의 이름을 하나씩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럴때마다 선생님은 낱낱이 고개를 내저음으로써 우리를 무렴하게 만들곤했다. 아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좋은 나라는 영세중립국, 만년 평화의 나라, 바로 스위스란다.
무슨 속셈으로 어린 우리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그때는 선생님의 흉중을 당최 헤아릴 재간이 없었다. 다만, 그 말을 할 때의 선생님 얼굴에 떠오르던 허탈한 미소만이 가슴 철렁한 느낌으로 남아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훗날 나는 그 선생님을 모델로 해서 졸작의 중편 「꿈꾸는 자의 나성」을 쓴 적이 있다. 전시 상황을 유신독재 말기의 상황으로 재구성해서 노상 해외 이민만을 꿈꾸는 꾀죄죄한 중년 남자를 등장시켜 그로 하여금 걸핏하면 다방 전화로 항공사에 LA행 비행기표에 관해 문의하게끔 꾸민 소설이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그렇다. 정치권도 아니고 정치계도 아니고 얕잡아 일컫는 뜻의 정치판이 분명하다)을 보면, 백성들에게 이민을 강요하는 파행 정치를 통해 과밀인구 문제를 해결하기로 여야간에 단단히 합의라도 본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각종 현안에 따른 성명과 발표와 폭로에 접할작시면 정치판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판의 실력이 9단이라면 백성들의 실력은 아마 10단쯤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단련 과정을 거쳐 어느덧 입신의 경지에 도달해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정치판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정치판의 난무하는 발언들을 나름대로 가려 들을 뿐 아니라 행간에 감추인 저의까지 정확히 잡아낼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씨도 안먹힐 허황한 말로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정치인이 아직도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오만방자한 성격이거나 지능지수가 아주 낮은 사람일 것이다.
사정이 있어 한때 조국을 등지고 떠났던 동포들까지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정치가 훌륭한 정치일 것이다. 멀쩡하게 잘 견디고 버티던 국민들까지 끝내 절망시켜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이민을 떠나게끔 만드는 그것이 새 천년을 목전에 두고 요즘 부쩍 자주 들먹여지는 그 세계화는 아닐 것이다.
자고새면 수탉들끼리의 세력 다툼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닭장안에는 애당초 평화와 행복이 있을 턱이 없다. 수탉들이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는 동안 다치고 불행해지는 건 어리고 약한 병아리들뿐이다.
족제비나 살쾡이라도 한 마리 닭장안에 침입했을때 목숨걸고 맞서 싸울 용사는, 세력다툼에 고부라진 수탉이 아니라 병아리들을 죽지안에 품고있는 암탉이다.
새 천년부터 수탉같은 정치인들 깡그리 물러가고 암탉 닮은 정치인들만이 오롯이 국정을 담당하게 된다면 여북이나 좋으랴.
/윤흥길·소설가·한서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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