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비 망령이 부활했다. 내핍과 절약의 목소리는 낯설기만 하고 소비증가폭이 소득증가율을 2배 이상 앞질렀다. 호화사치품 수입은 지난해보다 70% 이상 늘고 수백만원대 모피와 수입의류, 골프용품, 대형가전제품 등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다. 고급 음식점과 룸살롱은 예약이 넘친다. 국제통화기금(IMF) 2년의 세모(歲暮)를 물들이는 때이른 축제의 모습이다.소비증가폭은 7년만에 최고수준을 기록하고 저축률은 크게 줄어들었다. 가구당 빚도 지난해보다 52만원이나 늘었다. 올 10월까지 수입모피와 외제승용차는 지난해에 비해 4배가량 증가했고 고급가전제품 및 유명상표 선호도는 IMF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해외 관광객도 50%이상 늘어 여름 2개월간 지출한 돈이 9억달러를 넘었다. 최근 업무차 외국을 다녀온 회사원 이모(32)씨는 『쇼핑관광에 마구 돈을 뿌리는 부유층 아줌마들을 보고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고 말했다.
대형 백화점들은 올해 최대 매출액을 기록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본점 매출이 지난해보다 21% 늘어난 9,100억원을 기록, IMF 이전보다 1,000억원 가량 증가했다』며 『중·고가품 판매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와 강남 일대 고급음식점은 손님이 급증, 자리잡기가 힘들 정도다. 종로의 H·S 한식집과 강남의 K음식점은 며칠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방을 잡을 수 없다. 수백석 규모의 B횟집도 마찬가지. 소형차 붐은 자취를 감추고 중·대형차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3배 가까이 늘었다. 올해 휘발유 소비는 25%나 급증했고 10월중 신용카드 이용액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과소비추방범국민운동본부 박찬성(朴讚星)사무총장은 『사치소비재는 3-4배, 일부 일본 가전제품 수입은 30-40배가 증가하는 등 부유층과 일부 중산층의 과소비가 심각한 상태』라며 『이런 현상이 일부 부유층의 외화낭비에 그치지 않고 계층간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 더욱 문제』라고 지적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김태훈기자
■특금층 "파티 안끝났어요"
2년여에 걸친 국제통화기금(IMF)공습이 휘몰아친 우리 사회에도 「방공호」는 있었다. 방공호에 몸을 피한 일부 부유층들은 공습이 휩쓸고간 폐허의 자리에 모여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20-80」의 사회에서, 선택받은 「20」은 『이대로』를 외치며 사치 향락과 방탕의 파티에 젖고있다.
특금층의 성채는 더욱 견고해졌다. 2일 낮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H매장. 프랑스의 특정 고급브랜드만 판매하는 이곳은 100여평 크기로 꽤 넓지만 진열된 물건도, 손님들도 많지 않다. 진열돼 있는 물건들은 옷과 향수, 화장품, 구두, 액세서리 등. 이들 제품엔 하나같이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다. 외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온 50대 여자가 들어오자 여종업원이 반갑게 인사했다. 매장을 한바퀴 둘러본 여자는 종업원이 『새로 들어온 것』이라며 보여준 회색 원피스와 핸드백을 산 뒤 총총히 나갔다. 지불한 돈은 850만원. 이곳에서 10만원대의 물건을 찾기란 쉽지 않다. 조그만 손가방 하나에 50만원, 핸드백은 200만~300만원. 진주가 박힌 150만원짜리 머리핀도 있다.
고가의 외제품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강남 백화점 외제 전문 매장의 활황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매장 종업원은 당당하게 『물건을 갖다 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급 물건이 들어오면 VIP들에게 연락을 해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혼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한 외제승용차 판매매장의 직원은 『수요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정도는 늘어난 것 같다』고 전했다. 본보가 지난 3월 고발했던 「특금층」의 과소비와 향략 실태는 여전하다. 현찰뭉치를 등에 지고 다닌다는 「백패커」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유행이 생산되는 「청담특구」의 밤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쌓아올린 성채는 더욱 견고해지고 대담해지는 양상이다.
『IMF와 「고통분담」이라는 구호가 잠시동안만이나 씌어놓았던 염치의 탈조차 그들은 훌훌 벗어버린 듯 합니다』(30대 회사원 Y씨)『빈부격차를 운운한다는 것은 이젠 진부합니다. 한때는 이들의 행태를 들으면 분노도 했지만 이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20대 대학원생 K씨). 성채 바깥 사람들의 소감이다.
다시 확산되는 과소비병 특금층의 과소비는 중상류층에게도 과소비의 열병을 부채질하고 있다. 특금층이 IMF여부를 따지지 않았다면 중상류층의 고개든 소비열풍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일대에 밀집한 룸살롱은 연말을 맞아 자리 예약이 힘들다. 3~4명이 한자리에 앉으면 최소 100만원은 각오해야 하지만 기다리다 발길을 돌리는 회사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고급일수록 더 잘 나가는게 요즘 술집』이라고 한 룸살롱업주는 말했다.
J·B·T 등 서울 강남일대 유수의 메이저급 나이트클럽도 휘파람을 불고있다. 테이블당 최소 30만원이 기본이지만 주말 오후7시가 지나면 자리가 없다.
값비싼 외제브랜드를 착용함으로써 「20」쪽으로 동류의식을 느껴보려는 중상류층들의 발길이 백화점 외제 브랜드매장으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소비행태가 IMF 이전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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