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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칼럼] 대세기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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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칼럼] 대세기말에

입력
1999.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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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20세기가 간다.20세기를 마지막 보내는 1999년 12월의 우리나라 풍경은 가히 세기말적이다.

세기말 사상이란 19세기가 지나갈 무렵 유럽 여러나라에서 유행하던 인간정신의 퇴폐적 경향을 말한다. 종말의식에서 나온 회의주의, 염세주의, 찰나적 향락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인간의 속물성이 두드러지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기말을 사상적으로 극명하게 표현한 한 마디는 1900년에 죽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었다.

「신은 죽었다」는 섬뜩한 말은 한마디로 모든 기성가치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새로운 게시판에 새로운 가치를 적는 자를 십자가에 못박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사상의 요체다.

20세기를 보내는 세기말을 맞아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이제 「신은 모른다」는 말로 대치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가치의 부정대신 가치의 혼돈이 팽배해 있다. 올 한해 내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일들은 본말(本末)도 없고 시종(始終)도 없다. 본줄기가 무엇이며 곁가지가 무엇인지, 어디가 시작이며 어디가 끝인지 알기 어렵다. 경중(輕重)도 모르겠고 완급(緩急)도 모르겠다.

무슨일이 큰 일이고 작은 일인지, 어느 일이 급한 일이고 덜 급한 일인지 헷갈린다. 이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주조(主潮)속에 세기가 저문다.

게다가 19세기 말의 회의주의는 불신주의로, 염세주의는 냉소주의로, 찰나적 향락주의는 감정주의로 변형되고 속물주의는 그대로인채 천년의 대세기말에 와있다.

쇼펜하워에 의하면 정신적 욕구를 가지지 못한 자를 속물이라 부른다. 우리 사회에는 정신적 근간이 없다. 온 나라가 시정(市井)의 잡담에만 휩쓸려 다닌다.

속물은 소인(小人)이다. 실로 우리나라는 소인공화국이다.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퍼트란 소인국에서는 키가 6인치도 안되는 소인들끼리 두개의 당파로 나뉘어 격렬한 당쟁을 계속하고 있다. 두 당파는 그들이 신는 구두의 굽이 1.8㎜ 낮아야 하느냐 높아야 하느냐로 싸우면서 함께 식사도 않고 서로 말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정쟁이 꼭 이 꼴이다.

니체의 신이 죽고 나면 그 뒤에 오는 것은 허무주의다. 허무주의는 최고의 가치가 무가치해지면서 아무 목표가 없어지는 것이다. 목표가 없을 때, 방향을 잃을 때,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

우리 사회는 올 한해동안 고장난 유성기처럼 되풀이 되풀이 같은 토막의 노래만 불러댔고 묵은 보자기에 싸인 것을 도로 풀기만 했다. 재탕 삼탕만 하고 있었다. 정치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정치는 1년 내내 검찰에 맡겨놓고 있었다.

불가지론은 어느 것이 본줄기인지 모를 뿐 아니라 나라의 근본이 무엇인지, 나라의 갈길이 어느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씨랜드에 불이 나서 수십명의 어린이를 죽이더니 다시 호프집에 불이 나서 이번에는 수십명의 청소년을 죽여놓고도 나라라고 자칭한다. 언제 어디서 또 일어날지 모를 큰 불을 근본적으로 끌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고 여도 야도 정권 탈취에만 혈안이다. 기껏 이런 나라로 운영하기 위한 정권경쟁인가.

큰 강물이 흘러가는데, 강물이 세기의 물목에서 굽이치는데, 우리는 지류의 개천에서 노닥거리고 있다. 새로운 세기의 국가전략 하나 내놓은 것이 없다. 진군(進軍)의 신호로 둥둥 북소리가 울려야 할 이 때에 들리느니 금속성의 마찰음 뿐이다. 나라의 방향을 가리키는 큰 손가락이 없다.

나라를 지탱해온 반공 이데올로기가 20세기와 함께 퇴색하면서 우리는 국가적 사상을 잃었다. 반공을 대신할 새 세기의 지도이념도 없이 새천년 앞에 절벽 앞처럼 서 있다.

이런 것이 20세기 마지막 달의 을씨년스러운 우리나라 풍경이다.

19세기의 퇴영적인 세기말 풍조는 전환기의 문화형태였다. 낡은 것에 대한 고별의 의식일 수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호흡조절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 밀레니엄을 맞는 우리의 대세기말은 그 실향성(失向性)이 일출의 방향을 모르듯 세모를 더 어둡게 한다./본사 논술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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