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벗었다』로 화제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스타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성적 자극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다면 그 효과는 더욱 크다. 그녀가 벗었다. 소녀처럼 수줍어 하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 눈물만 흘리던 그녀가 어느날 스크린 속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진 모습으로 남자와 정사 연기를 펼친다. 그것도 가장 인기가 높을 때.「해피엔드」는 영화 자체보다 『전도연이 전라 연기를, 그것도 격렬한 불륜의 현장을 재연한다』는 사실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로서, 배우로서 일단 성공적인 전략이다. 사람들은 그의 「벗은 몸」을 관음하기 위해 「해피엔드」를 찾을 것이다. 전도연(26)도 인정한다. 『얼마나 벗었나 보자고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고.
시작부터 「벗은 몸」으로 보여주는 그의 불륜의 육체 언어는 꽤나 충격적이고 능란하다. 간절함과 애절함과 쾌락에 대한 집착은 분명 그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것이 순수한 이미지와 중첩되기 때문에 더욱 자극적이다. 그도 그랬다. 벗은 모습이 먼저 상상돼 처음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세기말의 인간의 아픔과 관계의 불안함 같은 것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는 얘기다.
전도연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최보라라는 여자를 인간적으로 이해하면서 영화 속의 삶과 구도가 보였다는 것이다. 『선정적인 연기가 큰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것이 주(主)였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쯤은 지금 이 시대에 봐야 될 영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치심을 버리기가 어려웠지만 촬영에 들어가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이렇게 한 작품 한 작품 해가면서 성숙하는 모양이다』
정작 어려움과 아쉬움은 다른 데 있었다. 불륜에 빠진 여자의 불안하고 복잡한 심리, 아이의 엄마와 실직한 남자의 아내라는 관계 속에서의 존재를 짧은 시간에 섬세하면서도 강하게, 더구나 일상 속에서 보여줘야 했다. 바로 「해피 엔드」의 존재 이유다. 『너무 어려웠다』고 실토했다. 주로 한가지 이미지를 깊게 하는 연기만을 해온 그로서는 당연하다. 실제 그 어려움은 영화 곳곳에 얕은 물처럼 나타났다. 여성, 엄마, 아내라기보다는 여전히 외롭고 연약한 도시여성의 냄새가 나는.
전도연에게는 「흥행 공주」란 별명이 붙었다. 「접속」 「약속」 「내 마음의 풍금」으로 이어진 성공의 결과이다. 「해피 엔드」가 또 한번 그 별명을 증명해 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벗은 몸」 때문이었다면 그는 소중한 것 하나를 잃어 버린 셈이 될 것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해피 엔드-실직자 아내의 위험한 불륜
아직 이 땅에는 행복한 결말의 불륜이란 없다. 이미숙의 「정사」조차 그것을 자신있게 깨지 못했다. 세기말의 불안한 정서의 힘을 빌어 영화가 우리의 도덕과 가치를 한번 흔들어 보지만 남은 것은 언제나 상처뿐이다. 그만큼 고정관념의 벽이 탄탄한 것인가. 아니면 현재보다 나은 성적 관계가 없다는 건가.
때문에 「해피 엔드」란 제목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인간관계도, 편안한 원래 자리로 되돌아 올 수도 없는 결말. 그 속에는 해체된, 부서진 가족과 인간의 잔해들만 남아 1999년 12월의 우울한 서울을 거울이 된다.
정지우 감독의 데뷔작 「해피 엔드」는 전형적인 삼각관계의 영화다. 실직한 남편 서민기(최민식)의 아내이자 어린 딸을 둔 최보라(전도연)가 첫사랑이었던 김일범(주진모)과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이 「불륜」인 것은 최보라가 유부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욕심 때문이다. 그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가정과 열정 모두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어느 한쪽이 세게 당기거나 줄을 놓아 버릴때 「치정극」으로 끝이 난다. 줄을 놓아버린 사람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은행원 출신답게 소심하고 여리며, 꼼꼼하고 가정적이다. 헌 책방의 풍경, TV연속극에 대한 관심, 가계부 쓰기, 재활용품 정리 등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소시민적 이미지는 최민식의 능청스러움과 맞물려 코믹한 풍경을 만든다. 아내와 남편의 뒤바뀐 역할은 IMF 한파 뒤의 세기말 우리 사회의 비극을 보여주면서 후반 남편의 배신감과 절망의 크기를 확대시킨다. 은연중 아내의 불륜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 느낌은, 아내의 외도 현장은 강렬하고 간절하지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깊이있는 성찰을 유보했기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모험이 남편에게 들키자 한번쯤 다시 찾고 맛보고 싶은 첫사랑, 흔적없이 스치듯 지나가는 그런 일탈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리고는 송일곤의 단편 「소풍」처럼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가 돼 자신에게 집착하는 첫 남자에게 『미쳤다』고 소리친다. 그 순간 영화는 새로운 해피엔드의 꿈을 잃고 가부장제에 갇혀 버렸다. 11일 개봉. 오락성★★★☆ 예술성★★★
(★5개 만점,☆은 1/2 한국일보 문화부 평가)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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